저기 저 노란 치마를 입은 꼬마 숙녀 보이시나요? 웃고 있는 얼굴이 참 사랑스럽네요. 벤치에 앉아 계신 아저씨는 고민이 있는지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이시네요. 자, 여러분 눈앞에 펼쳐진 이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 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얼마나 객관적이며 또 얼마나 사실적인지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은요? 오늘은 ‘인식(認識)’이라는 키워드로 나와 세상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해요. 흔히 드라마에도 그런 장면이 있잖아요. 저 청년이 알고 봤더니 내 아들이고, 사랑하는 여자가 알고 보니 내 이복동생이었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냔 말이죠.
세상을 탐험하기에 앞서 먼저 나의 인식 도구들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먼저 체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배에서 꼬르륵하고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니 s___p가 스프(soup)처럼 보입니다. 가족과 함께 외식을 가던 길에 귀여운 개를 좀 쓰다듬었더니 같은 글자가 비누(soap)로 보이네요. 눈은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로또 번호가 겨우 두 개만 맞았지만 ‘그래, 이번에 두 개 맞았으니 다음번엔 반드시 대박을 친다는 사인(sign)일 거야, 그 많은 돈으로 뭘 하지?’ 하며 또 로또를 긁는다고 합니다.
코요? 감기라도 걸렸다면 코는 있어도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습니다. 멀쩡해도 문제입니다. 가령 삼겹살 식당에 들어서자 확 풍겨오는 고기 냄새에 잠시 머뭇거립니다. 하나뿐인 양복에 냄새가 배면 안 되는데 하고 주저합니다. 웬걸요, 앉은 지 5분도 안 되어 냄새는 온데간데없습니다. 코에 냄새가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미 옷에는 냄새가 속속들이 밴 것도 물론입니다.
귀는 또 어떤가요? 소리가 너무 커도 우리는 들을 줄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는 당연히 지구가 자전(自轉)하면서 내는 소리일 텐데, 그 큰소리는 귀가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역대를 벗어났기 때문에 지구에 사는 우리는 전혀 듣지 못합니다.
피부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영하 5도에 피부가 노출되었다고 가정하면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영하 30도에 있다가 경험하는 영하 5도는 차라리 따뜻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피부나 촉감(觸感)도 똑같습니다.
압권은 미각(味覺)이 아닐까 싶은데요. 한 친구가 다른 친구 몰래 이온음료인 포카리스*트에다 오렌지 주스를 섞어서 건네줍니다. 그 이상한 조합을 모르는 친구가 말합니다. “이 망고주스 진짜로 맛나네” 재미를 느낀 친구는 몰래 우유를 살짝 섞어서 다시 건네줍니다. 그걸 마신 친구는 블링블링한 눈빛을 하고는 이렇게 외칩니다. “오빠야, 내 줄라꼬 바나나 주스도 가져 왔나?”
세상을 바라보고 맛보며 만져보는 우리 오감(五感)은 사실 믿을 게 못 됩니다. 한결같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어설픈 도구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는 있는지, 또한 그렇게 드러난 세상은 과연 왜곡 없이 완벽한 그것일지는 아무도 보장 못합니다.
‘나와 세상’은 불교적 관점에서도 부정적입니다.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장치로 눈, 귀, 코, 입, 피부, 마음을 6근이라고 합니다. 눈 코 등 6개 채널과 쌍(pair)을 이루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6경(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맛을 볼 수는 없는 것처럼 눈에는 색깔, 귀에는 소리, 입에는 맛이 서로 쌍을 이루는 거죠. 6근이 ‘나’라면 6경은 ‘세상’입니다. 세상을 경험하는 내 인식 도구들이 시원찮으니 세상도 당연히 불완전합니다. 개인 단위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각각의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타인의 그것은 절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걸 6식(識)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신김치를 좋아하지만 누구는 덜 익은 김치만 먹는 이유입니다. 지구 위에 함께 살고 있지만 각자 만지고, 먹고, 생각하는 방식만큼이나 다양한 세상이 공존(共存)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는 속담은 시도하는 만큼 완전한 소통은 어려움을 에둘러 표현한 금구(金口)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