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이씨 묵헌(黙軒) 이태수(李泰壽,1799~1857)는 회재 이언적의 후손으로,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이준(李浚)-이홍후(李弘煦)-이익규(李益圭)-이수담(李壽聃)-이의식(李宜植)-이희성(李希誠)-조부 이립(李岦)의 가계를 구성하며, 1799년 옥산 독락당(獨樂堂)에서 부친 이진연(李眞淵)과 모친 경주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조 이후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며 정치적 혼돈이 가속화되고, 노론을 제외한 남인 등은 정계에 나아가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면서, 영남의 선비들은 처사적문인의 행보로 학문을 연마하고 인간의 기본을 궁구하며 안빈낙도를 선택하는 선비가 많았으니, 묵헌선생 역시 그러하였다.
회재의 혈손 잠계 이전인은 독락당을 지키며, 수려한 계정(溪亭)의 한가로움을 가업으로 계승하였다. 묵헌선생은 옥산의 사산오대(四山五臺) 풍광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였고, 「어서각기(御書閣記)」를 통해 1835년 경주부윤 윤치겸(尹致謙,재임1834.6~1836.11)이 옥산 어르신들과 어서각 건립을 도모하고, 그해 3월~9월 공사를 마친 일 등을 기록하였다. 또 「남유일기(南遊日記)」를 통해 지역인사의 행보와 불국사-석굴암-만파정-대왕암-구강(鷗江)서원-동래-범어사-소산(蘇山)서원-천성산-통도사-반구(盤龜)서원-오산(鰲山)서원 등 유학의 연원과 학문의 연장을 기록하였으니, 모두 『묵헌실기』에 실려 있다.
묵헌재(黙軒齋)는 독락당 뒤 도덕산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찾을 수 없다. 예전 장산서원(章山書院.잠계공 배향)이 영천군 임고면 수성동에 있을 당시 이곳 계곡을 통해 독락당과 수성동을 오고 갔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옛길이 거의 사라져 안타까울 따름이다.
할아버지뻘 되는 낙곡(樂谷) 이질(李耋,1783~1854)과 강릉 김경인(金卿仁) 등이 「묵헌기」를 지었다. 이질은 잠계의 아들인 이순(李淳)의 후손으로 1847년 『잠계이선생유고』에 부록을 첨가하고,「관서문답(關西問答)」을 별도의 1책으로 편집간행하였고, 「서묵헌자기후(書黙軒自記後)」율시를 지었다.
김경인은 「묵헌기」에서 “묵(黙)은 때로는 알아도 잠자코 있고, 몰라도 잠자코 있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두 경우가 비록 우열이 있지만 균등히 행하여 처세로 삼는다면 폐단이 없을 것이다(黙有兩焉 或知而黙 或不知而黙 二者雖有優劣而均 爲處世而無弊也)”며 묵묵함에 대해 설명하였다.
묵헌선생은 왜 자신의 호에 묵(黙)자를 넣었을까? 당시 옥산은 서얼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된 노력과 사족 간 마찰도 발생하는 등 난국을 맞이하였고, 결국 1884년 서얼소통이 되면서 해묵은 갈등이 완화된다. 아마도 묵헌선생은 무엇보다 처신이 중요한 상황에서 『논어』에 등장하는 요산요수(樂山樂水: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을 물과 산에 비유하며 산수의 경치를 좋아하는 말의 표현)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어떠한 답을 구하고자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오히려 해답에서 멀어지고, 그저 묵묵한 것이 오히려 답에 가까워지는 길임을 작자는 깨달았고, 결국 산수가 주는 묵묵(默默)의 의미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떠나 산과 물이 있는 옥산의 계산(溪山)에서 조용하게 지내고자한 자신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듯하다. 묵헌선생은 ‘묵헌’이라 호를 정한 이유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묵헌자기(黙軒自記)무릇 천지산천과 일월성신은 모두 요순임금의 천지산천과 일월성신이요, 인간은 그 사이에 만물과 함께 포함되었다. 그리고 마음은 몸의 중심이 되니,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이고, 삼재에 간여하고 여러 이치를 갖추었고,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이다. (마음에) 그 선함을 채우면 성현과 함께 돌아갈 것이고, 그 하고자함만을 따르면 짐승과 어긋남이 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인물들이 사귀고자하나 가려져서 의리의 퇴패(頹敗)함을 알지 못하고, 한갓 재물과 이익의 탐내고 가질 줄만 알고, 대부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함이 있다. 아! 애석하도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초목곤충과 더불어 썩어가는 물건이거늘, 사람들 모두 준수하지만 나만 유독 어리석고, 사람들 모두 말을 잘하지만 나만 유독 귀머거리인 듯하다. 이러한 까닭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묻지만 하늘은 하늘대로 말이 없고, 땅을 굽어보고 묻지만 땅은 땅대로 말이 없다. 산을 가리켜 묻지만 산은 산대로 말이 없고, 돌을 가리켜 묻지만 돌은 돌대로 말이 없으니, 모두가 잠잠[默默]하기에, 나 역시 ‘묵(黙)’으로 집의 이름을 삼았다. 누워서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산 중의 잠잠한 구름이요, 앉아서 눈 가는대로 보는 것은 시냇가의 잠잠한 달이다. 이 때문에 성시(城市)의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계산(溪山)의 밝은 달빛에 누웠으니, 시경의 ‘요산요수(樂山樂水)’를 한평생 입에 머금노라. 이에 기록한다. 계축년(1853)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