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관광컨벤션과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 몇 년간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은 불국사가 716만675명(2014~2018년까지의 누계)으로 부동의 1위였다. 이어 동궁과월지 706만5744명으로 2위, 경주월드 557만5597명으로 3위, 석굴암 366만7132명으로 4위 순이었다. 그밖에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남산, 동궁원, 양동마을, 대릉원 등의 순이었다. 교촌한옥마을, 양남주상절리 등의 약진세가 보이기도 했다. 경주시 관광객 통계를 살펴보면(2014~2018년) 2018년 1288만6257명(외국인 58만648명), 2017년 1261만8344명(외국인 56만6303명), 2016년 1095만1227명(외국인 56만5593명), 2015년 1136만9482명(59만186명) 2014년 1382만3451명(외국인 73만6529명)으로 나타났다. 경주에 연간 천 만명이 훌쩍 넘는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근대 경주 관광’의 태동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일제는 경주를 조선 제일의 관광 특구로 개조했다. 경주의 모든 것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했고 활용했으며 정책도 이에 맞춰졌다. 경주의 관광도시화를 자극한 결정적인 계기들이 있었는데 석굴암의 발견과 금관의 등장, 불국사역까지 우선 개통된 경동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개관 등이 그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주사회와 경주민의 역정을 총망라한 뜻깊은 저술인 최부식 저자의 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에서 민족관광도시 경주의 태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본 기사는 이 저서에서 발췌하고 인용해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경주, 조선에서는 가장 먼저 제국주의와 자본의 결탁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관광도시’로 탈바꿈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관광’은 옛날에는 ‘유람’, ‘탐승’ 이라고 썼다. 근대적인 여행을 뜻하는 관광은 일제강점기부터 등장했다. 경주와 같은 역사도시나 자연경관지가 근대관광의 목적지가 되기 시작한 시점은 일본의 근대화와 맞물려있었다. 일본은 교통망 확충, 통신망 구축, 서구 인쇄술 등을 들여와 근대적 관광 여행의 조건과 사회적 분위기가 일찌감치 성숙돼 있었다. 일제는 이를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를 통해 그들의 목적과 이익에 맞춰 들여왔다. 조선시대 가장 인기를 끈 곳은 단연 금강산이었다. 금강산 이외에도 전국 명승지를 다녔고 경주도 많이 찾았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고 역사유물이 많은 곳임에도 실질적으로 주요 유람 대상지는 아니었다. 당시 유람지는 빼어난 자연경관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신라 고도 경주를 찾는 유람객은 특별한 신분에 있는 사람들에 국한됐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불국사와 석굴암, 남산의 숱한 불상들은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서 유람의 대상에서는 밀렸다. 그러나 경주는 조선에서는 가장 먼저 제국주의와 자본의 결탁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관광도시’로 탈바꿈해간다. -경주의 관광도시화를 자극한 결정적인 계기... ‘석굴암의 발견’ 일제의 대륙 진출을 위한 한반도 정탐 활동 중 이마니시 류 라는 인물은 1906년 경주 유적지를 조사했고 황남리 고분 2기를 파헤친다. 당시 누대에 걸쳐 신라왕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온 후손들은 왕들의 무덤이 마구 파헤쳐지는 것을 보면서 경악했다. 그러나 경주 동헌을 지키던 조선 관리들이 내쫓기고 동경관에서 국왕의 위패가 치워지는 장면을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1907년 석굴암이 발견된다. 우체부 김씨가 불국사를 거쳐 토함산 고개 넘어 감포쪽으로 우편배달을 나섰다가 범곡 근처에서 천장이 무너진 석굴암을 발견한 것이다. ‘천정은 무너져 내렸고 그 안은 흙으로 가득차있다. 그 속에는 돌부처들이 묻힌, 돌사람들이 굴속에 가득차있다’라는 보고를 한다. 당시 조선인들과 경주민들은 석굴암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고 부처님오신날이나 백중날 같은 중요한 날에는 예불을 올리고 공양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에 우체부의 ‘처음발견’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여하간 이 ‘석굴 발견’은 통감부에 보고되고 1909년 부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을 직접 보기위해 경주로 온다. 당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1907년에는 정미의병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루부미 저격사건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요동치던 때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부통감 소네가 경주를 찾은 것은 문화재와 고서적 수집에 혈안이 되어있던 소네의 구미를 자극했을 것이다. ‘동양무비(無比, 동양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고의 작품)’인 석굴암을 해체해 서울로 옮기도록 작정하고 군수에게 석굴암을 뜯어 옮기는데 필요한 예산을 올리도록 경상도 관찰사에게 지시한다. 이 터무니없는 석굴암 경성 이축계획은 나중에 원천 무효화된다. 석굴암 경성 반출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이 소식은 널리 퍼졌고 폐허의 불국사와 석굴암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와 수리복원된 불국사 석굴암 사진도 대량으로 보급유통된다. 이 그림엽서는 제국의 문화 정책과 그들의 우월성을 선전하는데 유용한 수단이었고 관광업자들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대량 유포시킨다. 석굴암은 일제가 조선 반도에서 발견한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수백 개 부재를 짜 맞추는 방식으로 축조된 유일의 인공 석굴이라는 점을 간파했고 세계 건축사상에서의 의의도 알아챘고 크게 환호했다. -왜 우리나라 각지에서는 당시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수학여행지로 택했을까. 비록 국권은 뺏겼으나 경주는 우리에게 ‘민족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 경술국치 2년 후인 1912년에는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석굴암을 찾았고 석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라고 명령한다. 석굴암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석굴암 탐방에 나서게 하고 그들은 석굴암 곳곳에 낙서와 각자를 남긴다. 이러한 낙서와 각자를 통해 석굴암이 발견(1907년)된지 불과 4~5년 사이에 석굴암이 폐허상태였음에도 경주 인근에서는 물론, 서울의 보성중학교가 수학여행을 오고 일본인들도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에 도착한 수학여행단은 불국사까지는 자동차로, 석굴암에는 산길을 따라 토함산에 오르내렸다. 1913~1915년까지 행해졌던 1차 수리 공사 후에는 더욱 많은 수학여행단이 경주로 밀려들었다. 왜 우리나라 각지에서는 당시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수학여행지로 택했을까. 석굴암 탐방은 비록 일제에 의해 촉발되고 권장되긴 했어도 그 이면에는 우리 선각자들의 앞날을 내다보는 깊은 뜻도 숨어있었다. 그들은 미래세대에게 ‘비록 국권은 뺏겼으나 석굴암이라는 최고의 예술품은 바로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일깨워 주려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경주는 우리에게는 민족의 성지라는 또 다른 의미의 민족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주 관광 촉발시킨 또 하나의 축은 신라 금관의 등장, 경주가 최고의 여행지로 부각된 이유 경주 관광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축은 신라 금관이었다. 1921년 9월 25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서리에서 주막을 하던 박문환의 집 뒤뜰에서 신라금관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경주에서 전국으로, 일본으로, 온 세계로 퍼진다. 신라 임금님이 머리에 썼다는 황금관이 나왔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을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경술국치를 전후해 최고 통치자 2인이 잇달아 경주를 방문하면서 일본인은 물론, 그동안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조선인들도 경주를 주목하던 중이었다. 석굴암 발견과 1910년대 석굴암 수리복원, 1920년대의 불국사 수리복원으로 경주의 명성은 높아질대로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에 금관총 금관의 등장은 전국의 시선을 또 다시 경주로 집중시켰다. 조선인은 새로운 자각과 함께 민족 자존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와 조선인의 서로 상반된 입장과는 무관하게 경주는 최고의 여행지로 떠오를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경주고적보존회 발족되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개관...경주 관광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고 경주에 관광지 경제 형성돼 한편,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발족된다. 고적보존회는 총독부 정책과 행정절차에 따라 운영된 총독부 문화재사업 대행 경주 실무기관이었지만 신라유적과 유물들이 고적보존회의 노력으로 그나마 온전하게 유지되었고 근대 경주 관광 태동에도 한 몫 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은 컸다. 고적보존회는 발족과 동시에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관광객을 위해 관광지 정보가 담긴 각종 고적지도, 안내지를 만들고 사진엽서 등을 제작해 널리 유포시켰다. 사진집 ‘신라구도 경주고적도휘’에는 각 유적유물에 대해 영문 설명문을 달아 외국인들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근대관광에는 대상지의 역사성이나 풍광, 교통 여건과 숙식 시설이 기본 조건인데 여기에 관광 분위기 조성과 확산이 필수적이었으므로 고적보존회가 이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경주는 조선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본격 관광이 열린 뒤에 나온 말이지만 ‘산이라면 금강산이고 고적지는 경주며 예술의 극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경주’라는 예찬이 쏟아지면서 경주 관광의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고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문을 열었다. 일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경주를 샅샅이 조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놀라운 황금 금관이 계속 나오자 박물관 경주분관을 설립했던 것이다. 조선 전역에서 관광객들이 경주로 왔고 분관이 설립된 뒤로는 주요 외국인들에게 경주 방문을 유도했다. 경주분관 주변에 골동품 가게가 생겨나면서 조상들의 유물이 사고 팔렸고 날마다 관광객들이 경주를 찾았고 경주 분관도 방문했다. 경주민들은 이들을 맞이할 여관과 식당을 열었으며 기념품도 만들어 팔았다. 경주에 관광지 경제가 형성된 것이다. 일제는 신라 유물과 유적을 통해 조선 지배의 당위성을 인식시키는 장치로 활용했고 관광 온 조선인들은 민족적 자긍심을 얻어가기도 했다. 이것은 일제때 민족관광도시 경주의 양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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