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즉위하고 당쟁의 심화와 흉년이 거듭되어 정국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때 암행어사 박문수는 소임을 다해 목민관의 바른 길을 열었고, 경주부 역시 백성들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으나, 부윤 김시형(金始烱,재임1730.11~1732.10)의 활약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다. 1732년(영조8) 전국에 큰 흉년이 들자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은 경상도관찰사 신분으로 경주부윤이자 친구인 김시형(1681~1750)을 찾아 진휼(賑恤)을 잘한 공을 치하하였다. “영조 즉위 8년(1731) 흉년이 들어 전국을 구휼하였다. 나라에 기근이 들면 영남이 가장 심하였으나 구휼을 가장 잘하였다. 또한 경주가 구휼을 가장 잘하였는데, 경주부윤은 나의 벗 김시형[자 계장(季章)]이다. 김계장은 구휼을 하면서 모아진 바른 곡식을 금옥처럼 귀하게 여기고, 흩뜨러진 나쁜 곡식을 썩은 흙 대하듯 하였다. 이는 몹시 굶주려 견디지 못하는 수만의 백성이 구제받았다. 임자년(1732) 5월에 구휼을 마치자, 김시형은 쇠고기와 술과 음식과 기악(妓樂)을 갖추어 고을의 노인들과 관리와 선비 그리고 백성 가운데 곡식을 낸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성공을 아뢰었다『歸鹿集』卷18,「慶州罷賑宴記」”며 당시 파진연(罷賑宴)에 참석해 그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부윤 재임 당시 화계 류의건은 나릉진안설(羅陵眞贗說)을 통해 서악리의 진흥왕·진지왕·문성왕·헌안왕의 위치를 부정하는 신라왕릉 비정에 관한 글을 시류에 따라 내놓았고, 1642년(인조20)부터 1742년(정조18)까지 서원의 설립·혁파·사액·치제·급전·급노 등 여러 사항을 편년순으로 엮은 『서원등록(書院謄錄)』에 의하면, 1741년(영조17) 8월 15일 경상도에서 갑오년 이후에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경주부 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는 찰방 이언괄·군수 권덕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임자년(1732) 5월에 창건하였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현명·부윤은 김시형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신중(李愼中)이다”며 유학의 확립에도 힘썼다. 게다가 경주부윤을 마치고 조현명을 이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며 목민관의 올바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김시형의 아우인 김시희(金始熺) 역시 영천을 다스렸는데, 흉년에 두 형제의 선정(善政)은 타인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경주와 영천을 노나라와 위나라 형제국가로 비유하였는데, 노·위는 모두 주공과 강숙의 후예로 김시형·김시희 두 형제를 비견하였다.귀 록(歸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은 부친 조인수(趙仁壽)와 모친 김만균(金萬均)의 따님에서 성장하였고, 노론계 학자로 김재로·송인영·박문수 등과 교유하였다. 1713년(숙종39) 진사가 되고, 대사헌·도승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위로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경주성 남루 기문을 지었다. 慶州城 南樓記 내(조현명)가 경상도관찰사를 지낼 때 승선(承宣) 김시형은 경주부윤으로, 그의 아우 지부랑(地部郞) 김시희는 영천군수로 있었고, 경주와 영천은 경계가 나란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암행어사가 되어 경주와 영천이 가장 잘 다스려진다는 소문이 있었고, 의논하는 자들이 김씨형제는 난형난제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김시형은 벼슬이 높아져도 태만하지 않고 더욱 근심으로 삼았다. 경주는 옛 도읍으로, 물자가 많고 땅이 넓어서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불렸다. 따라서 조정에서도 관리를 비중있게 선발하면서 김시경이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때 김시경은 이미 충청도 관찰사(湖西伯)가 되어 군권을 잡고, 50 고을의 관리를 평가하였으며, 조정에 들어가서는 승정원과 사간원 사이에서도 자신 있게 행동하였으니, 그 지위의 덕망은 실로 이미 성대하였다. 영남이 새롭게 왜구의 난리를 겪으며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백성의 생활은 편치 못하였다. 이에 병든 것을 제거하고 무너진 것을 되살리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근심하며 잠자리와 먹는 것을 돌볼 겨를도 없었고, 또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았다. 이에 군사를 정비하고, 성벽을 보수하여 수비와 방어의 완급을 갖추었고, 모든 일을 다 마쳤으니, 경주부윤으로 부임한지 겨우 수개월이었다. 백성들은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며 그의 덕과 공을 칭송하였으니, 이는 암행어사가 임금께 보고한 결과였으며, 그의 어짊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누가 이와 같이하겠는가? 경주성의 남루 공사를 마치고, 편지를 보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승낙하며 “지금 영남의 백성이 되어 먹고 마시는 혜택을 입고 생업에 편안하여 즐겁게 살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경주사람이 그러하다. 게다가 가까운 주변의 큰 도읍이면서 성과 군사는 견고하여 근심이 없고 믿음이 가는 곳은 오직 경주부가 가장 나았다. 이른바 지리인화(地利人和:지리적 조건과 사람의 화합)가 갖추어졌으니, 기록할만하다”라 하였다. 김시형은 진실로 노나라 성인의 가르침을 경주에 행하였고, 또 형제의 국가로 변천할 수 있었으니, 즉 경주는 노나라가 되고, 영천은 위나라가 된다. 다시 암행어사의 심부름꾼이 이르면 임금께 포창의 글이 아침저녁으로 또 오르내리고, 평판이 퍼져서 온 영남 70 고을 모두가 장차 추(鄒:맹자)와 노(魯:공자)로 가득할 것이다. 재능이 없고 오래도록 나라를 더럽힌 나 같은 자 역시 그 사이에 앉아서 성공을 누릴 수 있으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