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교향곡 형식이 낭만주의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 지는 괴짜 베를리오즈(L.H.Berlioz/1803-1869)가 잘 보여준다. 그의 환상교향곡(1830년)은 낭만주의 표제음악의 효시로 불리는데, 5악장으로 되어 있어 기존 4악장 형식을 벗어났고, 3악장에는 미뉴에트가 아닌 왈츠를 넣었다. 이어서 리스트(F.Liszt/1811-1886)는 단(單)악장 교향곡인 교향시를 만든다. 진보적 낭만주의자들은 교향곡에 이야기를 넣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자신의 실연(失戀)에 관한 곡이고, 리스트의 교향시도 시(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바그너(R.Wagner/1813-1883)는 이야기가 없는 절대음악은 공허한 음의 울림에 불과하고, 이런 교향곡은 베토벤에서 끝났다고 말한다. 실제로 베토벤이 죽은 후 19세기 중반까지는 절대음악의 맥을 이을만한 교향곡이 나오지 않아서 바그너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브람스(J.Brahms/1833-1897)가 나타난다. 그는 고전주의와 절대음악을 고수했다. 멘델스존(J.L.F.Mendelssohn/1809-1847) 사후 끊긴 고전파의 명맥이 살아난 것이다. 나이 40이 넘어 발표한 교향곡 1번(1876년)을 가리켜 뷜로(H.von Bülow/1830-1894)는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잇는다는 뜻이다. 또한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음악의 3B로 불리는 명예를 누린다. 그는 이후 고전적 형식에 맞춘 교향곡 세 곡을 더 작곡한다. 바그너는 이런 보수주의 음악가 브람스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바그너는 사사건건 비판을 가했지만, 브람스는 바그너와 대립각을 세우진 않았다. 나이가 20살이나 어린데다 음악장르도 중복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브람스는 바그너의 숭배자인 브루크너(A.Bruckner/1824-1896)와 다투었다. 두 사람은 교향곡 분야에서 충돌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1845년)를 보고 열렬한 바그너주의자가 된 브루크너는 이후 명성을 얻은 후 자신의 교향곡 3번(1873년)을 바그너에게 헌정한다. 한편 교향곡 7번(1883년)은 바그너를 애도하는 곡이다. 2악장에서 그를 잃은 슬픔이 바그너튜바(Wagnertuba)에 절절히 묻어나온다. 아마 바그너에게 세 번째 B는 브람스가 아니라 브루크너였을 것이다. 바그너 대 브람스, 진보 대 보수의 대립구도는 당대 최고의 음악평론가였던 한슬리크(E.Hanslick/1825-1904)가 만든 프레임이었다.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가 낭만주의의 거장이 되어 진보음악이 온 유럽을 풍미하던 시절에 고전주의 절대음악을 옹호하여 시대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아는가? 바그너든 브람스든 그들의 뿌리는 베토벤이란 사실을! 베토벤은 형식을 만들고 파괴함으로써 그들 모두의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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