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는 관음과 관련한 여러 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중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정취·조신’조에 의상은 관음을 친견하지만 원효는 관음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오래 전 원효가 알아보지 못한 관음을 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가피(加被)를 입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집안 형편이 대단히 곤궁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가을 운동회 예행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전날 저녁은 못 먹고 당일 아침은 굶은 채 학교에 갔다. 단체경기를 하는데 운동장이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순간 옆 반 남자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따귀를 맞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연습을 마친 후 점심시간이 되었다. 교실로 들어오니 담임이신 윤○희 선생님이 부르셨다. 자신의 도시락을 건네주시고 선생님은 교실 밖으로 나가셨다. 그 도시락은 이 세상에서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이후에도 가끔 선생님의 도시락을 내가 차지하곤 했었다. 아마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선생님의 얼굴은 흡사 달님과 같이 훤하시고 목소리가 참 맑은 여 선생님이시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이 바로 관음보살이시었던 것이다. 철이 들어 선생님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 세상에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보타락가산에 상주하실 것 같다. 관음전은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무설전 뒤에 있는 계단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다. 이 계단을 낙가교(洛加橋)라고 하며 들어가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고 한다. 관음전을 높은 곳에 짓는 것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 보타락가산으로 바위 절벽으로 된 산이었던 것에서 연유한다.『불국사고금창기』에는 관음전 일곽에 조선시대만 해도 동서행랑, 해안문, 낙가교, 취죽루, 녹양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동서 행랑과 취죽루, 녹양각은 볼 수 없다. 관음전의 관음상 복장기(腹藏記)에 경명왕 6년(622)에 왕비가 악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관음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관음전은 조선조 성종 1년(1470)에 중수하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선조 37년(1604)에 새로 짓고 숙종 때인 1695년과 1718년 두 차례 수리를 하였다. 관음상은 현종 15년(1674)과 숙종 27년(1701), 영조 45년(1769)에 각각 개금(改金)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관음상 이전의 일이다. 현재 관음전에 모시고 있는 관음상은 1973년 관음전을 복원할 때 새로 조성한 듯 하다. 대부분의 사찰 전각은 지붕이 맞배지붕이 아니면 팔작지붕인데 불국사의 관음전은 사모지붕이다. 사모지붕은 정자 건물에서 흔히 불 수 있는 형태이다. 관음전은 1969년 발굴 이전에 주초석만 노출되어 있을 뿐 하부는 전체가 흘러 들어온 모래에 묻혀있었다. 주초(柱礎)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이다. 1969년 기단을 노출시키면서 주변을 발굴하였으나 주변 건물 터전은 뚜렷하지 않았다. 관음전 관음보살상 후불탱화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관음상이다. ‘천수(千手)’는 자비의 관대함을 ‘천안(千眼)’은 지혜의 원만자재함을 나타내며 천 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한다는 염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