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과 당간지주 등 문화재와 함께아늑한 지형 끼고 동네 골목 이어져 경주시 탑동 남산 서쪽 남간(南澗)마을을 찾았던 지난 20일은 며칠간 내렸던 비가 찌뿌둥했던 오월의 하늘을 깨끗이 씻어내버린 듯 했다. 남간마을은 신라시대의 남간사라는 절이 있어 절 이름을 따서 지금에 전해진다고 한다. 남간사의 가람배치나 건물의 규모 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동네의 탑재들을 추정해서 이 동네 일대를 법당 터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새파란 하늘빛을 이고 선선한 봄바람이 지나가는 남간마을은 축복스런 땅이었다. 마을 입구서부터 ‘나정’과 ‘양산재’로 표상되는 작지만 유서깊은 이 마을은 고적한 가운데 신령스러웠으며 범상치 않은 동네였다. 남간마을 골목은 남간길과 남간안길로 이뤄져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큰 규모의 동네임을 직감할 수 있다. 오목한 지형에 아늑한 동네 골목들에는 기와를 이고있는 집들이 제법 이어져 시골마을치고는 골목도 제법 깊고 다양한 길이 이어져있었다. 남간마을에는 나정과 양산재를 필두로 남간사지 당간지주, 일성왕릉, 최초의 궁궐터 창림사지, 남간석정, 월암재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보광사라는 절과 남간교회도 공존하고 있다. 문화유적과 문화재 속에서 주민이 더불어 공존하고 있는 명품마을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남간마을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마을 한켠에선 주택 개조가 한창이어서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남간마을은 지금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올리고 있다. 마을회관 바로 맞은편 수백년 돼 보이는 노거수인 당수에 새끼줄과 흰천이 꼬여 여러번 둘러져 있었다. 남간마을은 서로의 가문과 성씨를 존중하며 조화로운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 동네였다. -남간사 터에 형성된 남간마을...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간사지 석정’ 등 문화유적과 공존하는 품위있는 마을  남간사는 탑동 남산에 있었던 절이다. 고승 혜통의 집이 있었던 은천동에 있었다고 하며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애장왕과 헌덕왕 때 이 절의 승려였던 일념이 ‘촉향분예불결사문(觸香墳禮佛結社文)’을 지은 것으로 볼 때 헌덕왕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남간사 옛 절터에는 현재 민가들이 들어서 마을을 이뤘고 주춧돌과 축대들은 주민들의 집에서 사용한다. 이 동네 집들 마당에는 유난히 석재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50여 가구가 모여살고 있다고하는 이 마을은 이 동네 집들을 짓고 형성될 당시, 석재들을 많이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모심기를 앞두고 무논으로 단장한 논들 사이로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인)’가 남산을 뒤로하고 우뚝 서 있어 이 마을이 절터였음을 확연하게 표식하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양지주가 동서로 대립해있고 상하에 간공(杆孔)이 있으며 높이는 3.6m이다. 이곳에서 시멘트 농로를 따라 왼쪽으로는 창림사지 가는 길이다. 또 마을의 한 가운데에서 신라시대 우물인 ‘남간사지 석정(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3호, 길이 80㎝, 너비 40㎝)’을 만났다. 남간사지 석정 주위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우물은 분황사 석정, 재매정과 더불어 신라 우물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주민의 삶 속 마을 안에서 문화재를 만나는 즐거움은 늘 신선하고 몇 배의 감동이 전해진다. -박혁거세 탄생 설화지 ‘나정’과 신라 6부 촌장 위패 모시고 제사 지내는 ‘양산재’ 있는 마을 마을 입구에 위치한 사적 제245호 경주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이다. 박혁거세 탄생 설화지인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의 왕실 의례 장소로 현재 이곳에는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해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등이 발굴 결과 확인되었다. 나정 인근의 양산재는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재각건물이다. 이곳은 신라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여섯 성씨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된 6촌장을 기리기 위해 1970년 건립했다고 한다. 양산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바로 옆 관리사동의 문이 열려 있어서 양산재와 뒤편 사당을 조심스레 들어가볼 수 있었다. 한편, 양산재 안내 간판의 글씨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아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골목들에선 유독 정갈한 이곳 주민들 심성 드러나는 자잘한 일상의 풍경들 만날 수 있어 남간사지석정 쪽에서 여러 골목이 이어져있는데 골목들 구석구석에는 유독 정갈한 이곳 주민들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잘한 일상의 풍경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도 남간교회 아래 집에서 60년간 살고 있다고 했다. ‘이 동네는 공기 좋다’는 자랑을 하며 땀을 훔친다. 한편, 마을 언덕배기에 위치한 남간교회는 50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작은 마을 교회는 매우 이색적이었으며 교회의 녹슨 철탑은 그간의 시간을 방증해주었다. 신도는 예전에 비해 줄었지만 동네 주민을 포함해 인근 주민들이 이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교회를 지나 다시 작은 골목으로 내려오니 ‘경주나정명차’라는 간판을 내건 작은 찻집도 보인다. 이 동네 마을해설사의 집도 있었다. 마을의 중앙쪽에는 남간경로당과 남간마을회관이 나란히 간판을 걸고 있다. -230여 년이 훌쩍 넘었다는 ‘一’자형 6칸 고택...보기 드물게 원형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한참 마을을 둘러보다가 230여 년이 훌쩍 넘었다는 ‘一’자형 6칸의 고택을 발견했다. 한눈에도 고색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한옥이었다. 오랜 기와는 매끈하진 않았어도 긴 세월을 버텨오며 시간의 기억을 곰삭여 온 듯했다. 보기 드믄 6칸의 기와집은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으며 당당했다. 이 고택은 양동마을서 이 마을로 이주해 온 손씨 일가의 집으로 현재 주인장인 손영호 어르신의 5대조가 지은 집이라고 했다. 이 집에는 손영호 어르신 종손 내외가 살고 있다. 대청마루 2칸, 방 2칸, 부엌 1칸, 창고 1칸으로 지어졌다는 고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안주인의 배려로 율무차 한 잔을 대접받는 호사를 누렸다. 장독대 옆에는 아직 우물도 남아 있었다. 손영호 어르신은 “다소 바람도 많이 들어오고 살기 편치 않은 점은 있어도 이 집을 그대로 보존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랑채로 똑같은 집이 한 채 더 있었고 문도 별도로 있었습니다. 세월은 변해가는데 저희가 못따라가니 헐어버렸습니다. 많이 안타까웠지요. 이 동네선 기와집으론 유일했고 가장 큰 집이었다고 합니다”라면서 이 고택이 얼마전 영화의 한 장면으로도 촬영됐다고 전했다. “이제 헐어버리고 많은 집들이 뜯겨 나갔지만 예전에는 이 동네에 집들이 많았습니다. 이 동네는 조용하고 살기 좋지요. 겨울엔 양지 발라서 집 댓돌위에 앉아있으면 돌이 달궈져서 친구들이 찾아와 등산하고 커피도 한 잔 하고 다녀가곤 합니다” -일성왕릉, 경덕사, 월암재 등 고대 신라서부터 근현대 아우르며 작지만 조화로운 동네 마을 가장 안쪽 일성왕릉을 찾았다. 일성왕릉은 보광사 라는 작은 절을 지나 소나무들이 울창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능은 사적 제173호로 신라 제7대 일성왕(재위 124~154)을 모신 곳이다. 단정하게 손질이 된 왕릉사이로 청량한 햇살이 내리쬐고 청설모 한 마리가 능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다시 보광사를 지나 웅장한 규모의 ‘경덕사’라는 사당을 만난다. 경덕사는 신라 개국의 원훈이며 배씨문중의 시조인 금산가리촌장 배지타와 그 후손으로 고려개국의 원훈이며 배씨문중의 중시조인 무열공 배현경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경덕사 바로 아래에는 마당 한 켠에 백농 배종성 선생의 흉상과 기념비가 모셔져있는 집을 볼 수 있다. 배종성 선생은 경덕사 건립 당시 공을 많이 들인 분이라고 하며 마당에서 그 후손을 잠시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최근 신축한 한옥들 뒤편으로 다소 높다란 것에는 월암재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월암재는 임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수시로 적진을 공략해 많은 전과를 올리며 큰 공을 세운 김호 장군의 재실이다. 2009년부터는 신라문화원에서 개보수후 고택문화체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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