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신앙     - 이병일 안 되는 것들이 많고 잠만 달아나는 산수(傘壽) 무렵, 위중한 일이 없으니, 북풍을 뚫고 자란 목련나무를 자주 바라봤다 두고두고 자랑할 일 없을까 해서 자식을 아홉이나 두었다고 했다 비는 빗소리로 잠깐씩 그늘을 들추고 눈발은 눈발대로 처마에 고드름을 매달고 가난은 봄빛이 푸르러질 때까지 환했다 어머니는 산봉우리와 내[川]와 해와 달과 소나무 밑에서 산밭을 개척하고 허리가 허옇게 튼지도 모르고 무씨를 뿌렸다고 했다 또한 자식들 인중 길어지라고 첫 밤의 요와 이불을 장롱 속에 고이 개켜두었다고 했다 ============================================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시다. 이런 여자가 기억나지 않는가? 이제 제대로 잘 운신하지도 못하고 새벽잠이 줄어든 여든[傘壽] 줄의 여인. 위중한 일이 없으면 시련(북풍)을 뚫고 키를 키운 목련의 의연함을 말없이 바라보는 여자. 목련나무는 결코 녹록치 않은 삶에서 건진 보람이 그만큼 빛난다는 증거. 자식을 아홉이나 낳은 이유는 자랑할 만한 인물이 혹 거기서 나와 집안의 둘레를 광휘로 채워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빗소리만 나도 갈무리해둔 농사며 종자, 집안의 온갖 이러저러한 그늘이 아른거리고, 눈발이 와도 즐기기보다 처마에 맺힌 고드름, 날선 칼이 되어 찔리고 베일 날을 염려하는 여자. 그러기에 그 가난은, 소박한 삶의 고귀함은 목련처럼 빛나고 환하기조차 하다. “가난은 봄빛이 푸르러질 때까지 환했다.” 빈한한 집에 시집 와서 고단했지만 고단을 모르고 살았던 여자의 삶은 어떤가. 그녀는 머얼리 산봉우리도 보이고 가까이 내[川]도 보이는 소나무 밑에서, 해 뜨는 아침부터 달이 보이는 한밤까지 억척같이 “산밭을 개척하고 무씨를 뿌”리느라 “허리가 허옇게 튼지도” 몰랐다. 수도 없는 돌멩이를 가려내고, 밭뚝을 만들고 이고 온 흙을 넣어 산밭을 만드는 일의 고역. 그런데 그 일을 하느라 드러난 허리가 다 굳게 갈라터졌다니! 바람과 추위가 맨몸을 습격하는 것도 잊은 채 식솔들의 생계를 위해 생애를 보냈다는 것. 그녀는 태어난 “첫 밤의 요와 이불을 장롱 속에 개”어 두면 수명을 상징하는 인중이 길어진다는 속신(俗信)을 믿는 작은 믿음이 있다. 그걸 미신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 작은 믿음이 지금의 세대를 이끌어 왔고, 오월 하늘에 빛을 몰고왔다.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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