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 풍광에도 천년향기 얼비치는 황룡사 구층목탑 중심 주춧돌인 심초석 사리공 내 유물 ‘찰주본기’ 비밀을, 처음 눈으로 가슴으로 맡으며 감개무량 했던 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특별전,(2018. 5.25-9.2) 형용할 수 없을 만치 벅찬 감동에 홀린 듯 넋을 빼고 들여다보았던 지난 기억이 새롭다. 특별전과 연계해 발표된 학술대회 논고 “황룡사찰주본기의 분석” 수정 보완한 판독해석 *이용현 강연을 경청하면서 출토유물을 통해 옛사람들이 남긴 유구한 역사의 찬란함을 천년숨결로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 삶의 지극한 깊이인 양 마음빛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872년 경문왕 12년에 무너진 황룡사를 다시 세우면서 중앙 심초석(心礎石)의 사리공(舍利孔) 안에 사리내함(舍利內函)을 봉안하였다. 찰주본기가 발굴된 황룡사 9층 목탑 심초석 안내판에는〔황룡사 목탑지는 심초석과 함께 64개의 초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62개의 초석이 존재한다. 심초석은 황룡사 9층 목탑의 가운데 기둥을 받치던 석재이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것은 초석을 덮고 있는 암석이다. 심초석은 동서 435㎝, 남북300㎝의 부정형의 긴 타원형이며, 두께는 104~128㎝로 무게는 약 30여톤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발굴 조사시, 심초석 사리공에는 경문왕 12년(872)에 제작된 찰주본기 명문이 적힌 금동사리함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으며 심초석 하부에는 청동제 팔찌, 청동제 그릇 등이 발견 되었다.〕《찰주본기》는 4장의 금동사각판 벽을 세운 상자모양으로 안쪽에 연꽃무늬를 새긴 뚜껑을 만들어 덮은 방형함 형식이나 현재는 뚜껑 없이 경첩으로 이어진 금동판을 펼쳐 놓은 모습이다. 상자 앞쪽 여닫는 문 안팎으로 수호신인 금강역사상을 새겨 놓았다. 안쪽 바깥쪽 6면 명문 기록은 당대 신라에서 유행했던 왕희지(王羲之)체와 구양순(歐陽詢)체가 섞인 날카롭고 뾰족한 칼끝으로 글자의 윤곽을 따라 가는 선으로 그린 쌍구체(雙鉤體)법이다. 제1판 내면에서는 ‘황룡사 찰주본기’라는 제목과 박거물이라는 지은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어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 자장(慈藏)이 중국의 종남산에서 원향선사에게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해동의 아홉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고한 뒤 이 탑의 조성이 추진되었다고 적혀있다. 제2판 내면에는 선덕여왕 15년에 탑이 완성된 뒤 90여 년이 지나 탑이 기울어 경문왕(景文王) 11년(871)부터 중수가 추진되었다고 적혀있다. 제3판 내면에는 이듬해까지의 중수 과정과 창건·중수 과정을 정리한 목적이 적혀있다. 외면의 제3판부터 제1판까지는 김위홍 등 중수를 주도한 관리들에 이어 여기에 참여한 승려들과 내·외직(內外職) 관리들, 황룡사·감은사(感恩寺)의 승려들이 나열되고 마지막으로 글을 새긴 이들이 언급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부터 중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고대 탑지(塔誌)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기록이 삼국유사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와 거의 유사한 점도 이 찰주본기의 가치를 증명해준다. 1964년 도굴되었다가 1966년 회수된 황룡사 심초석 사리공 내 유물 가운데 찬란한 기록을 펼친 찰주본기, 황수영에 의해 그 판독이 공표 되었으며 변선웅에 의해 성전(成典) 중심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처음 74행 905자의 내용이 공표 되었다가 1행 말미에 교찬(敎撰) 2자가 추가되어 907자로 보고되었다. 관련 내용의 전체 해석문은 *정병삼에 의해 최초로 정리되었다. 《황룡사 찰주본기》 시독(侍讀)이자 우군대감(右軍大監)이며 성공(省公)을 겸한 신(臣) 박거물(朴居勿)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대왕 때에 세운 것이다. 전에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명을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당나라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638)에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여왕 12년 계묘년(643)에 신라로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본국에 돌아와 선덕여왕께 청했다. 이에 왕은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독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지(阿非知) 등과 소장(小匠) 200명을 데리고 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선덕여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쳤다. 탑의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이다. 과연 삼한통합을 이루어 군신과 백성이 안락한 것은 구층목탑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다. (탑을 세운지) 백 구십여년을 지나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이르니 오래되어 동북쪽으로 기울어졌다. 무너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여러 재목(材木)을 모은지 3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의 왕이 즉위한 지 11년인 함통(咸通) 연간 신묘년(871)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왕의 친동생인 상재상(上宰相) 이간 김위홍(金魏弘)이 책임자가 되고 사주(寺主)인 혜흥(惠興)을 문승(聞僧)이자 수감전(脩監典)으로 삼아 그들과......대통(大統)이자 정법화상(政法和尙)인 대덕(大德) 현량(賢亮)과 대통이자 정법화상인 대덕 보연(普緣) 그리고 강주보(康州輔)인 중아간 김견기(金堅其)등 승려와 관인들이 그해 8월 12일 처음으로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짓도록 하였다. 그 안에 다시 『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거 하여 작은 석탑 99개에 각각의 석탑마다 사리 하나씩을 넣고, 다라니 네 가지와 경전 1권 책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여 철반의 위에 넣었다. 이듬해 7월에 9층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孤坐)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 그 물건은 불가사의한데 다만 날짜와 사유를 적은 것이 없었다. 25일에 본래대로 해두고 다시 사리 백개와 법사리 두 가지를 봉안하였다. (왕이) 사유를 적고 창건한 근원과 고쳐 세운 연고를 간단히 기록하게 하여, 만겁이 지나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하였다.함통(咸通) 13년 임진년(872) 11월 25일 적음.숭문대(崇文臺) 랑(郞) 인 춘궁(春宮) 중사성(中事省)의 신(臣) 요극일(姚克一)이 왕명을 받들어 씀. *이용현(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 찰주본기의 비밀」*〔부록〕 정병삼의 해석 (한국고대금석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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