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눈으로 보면 세상은 달리 보인다. 설마, 이게 말이 될까 싶지만 사실이다. 가령 목이 아주 마른 상황에서 마주하는 세상은 어떨까?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마실 수 있는 물과 그 외의 모든 것들로 나뉘어 보일 것이다. 생수병이나 커피 잔 속 아메리카노는 아주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릴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아무런 개성 없는 무채색일 것이다. 생수 옆에 놓인 비빔밥이나 뻥튀기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갈증이 나는데 뻥튀기를 먹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목이 멘다. 손톱에 가시라도 박혀있다면 내가 어디 뒀더라 찾고 있는 핀셋 말고는 온 세상이 흑백이다. 다른 눈으로 보면, 즉 시각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지는 법이다.
‘해석’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같은 맥락이다. 해석은 전적으로 인식 주체의 시각에 달렸다. 불교에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딱 이런 상황에 쓰인다. 여기 물이 있다고 치자. 이 물을 만약 젖소가 본다면 무엇으로 보일까? 아마 이 물을 마시고 우유를 만들어 낼 테니 소 눈에는 우유로 보일 것이다. 독사는 그래서 독약으로 보일 것이고, 지옥 중생들은 이것이 가래로 보일 것이다. 목마른 사람들은 당연히 감로수(甘露水)로 보일 것이다.
아무튼 같은 물인데 해석은 이처럼 다양하다. 이를 하나의 물에 네 가지 다른 견해라고 해서 일수사견이라지만 네 가지 견해뿐일까? 아니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삼*수 회사 사장이라면 나에게 생수는 생수가 아니다. 돈이나 유산(遺産)이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의 일수사견이다.
다른 눈으로 바라보면 사찰도 당연히 다르게 읽힌다. 불국사 관음전 앞 계단만 해도 그렇다. 관광객의 시각으로 보면 그저 불편할 뿐이지만, 수행자나 참배객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좁고 가파른 계단은 하심(下心)하기를 말없이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발 한발 조심해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조고각하(照顧脚下)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계단은 그 자체로 가르침이다. 누구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관촉사의 석조 미륵보살 입상(立像)도 그렇다. 몸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손발은 비례가 맞지 않아서 실소를 할 정도다. 하지만 비평가가 아닌 참배객의 눈으로 입상 바로 앞에서 위로 우러르면 큰 머리 미륵은 어느새 아주 비율이 좋은 부처님으로 바뀌어져 있다. 착시(錯視) 효과를 응용한 조상들의 위트 있는 가르침이다.
비평가가 아닌 참배객의 눈으로
위로 우러르면 큰 머리 미륵은
어느새 아주 비율이 좋은
부처님으로 바뀌어져 있다
착시(錯視) 효과를 응용한
조상들의 위트 있는 가르침이다
한편 무릎이 아파 걷기도 힘든데 왜 좋다는 절은 죄다 산속 아니면 정상에 있을까?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보면 수긍은 간다. 우리나라 사찰들은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한 불교 세계관을 공간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불교 세계관 중심에 있는 수미산 정상까지 가려면 일곱 개의 산과 그 사이의 여섯 개 바다를 건너야 하다 보니, 절마다 적어도 한 개 이상의 다리가 있고 공간적으로고 심산유곡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찰 음식.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겨울에 식재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산중에서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저장식품이 발달했다. 각종 장류, 장아찌, 초절임·소금절임·장절임 등 절임류가 그 예다. 영양소 파괴는 줄이면서 겨울철에 필요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짠 음식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저장음식이기 때문에 염분은 강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사찰음식은 건강식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사찰음식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뿐만 아니라 비타민과 각종 무기질이 풍부한 음식 재료를 사용해 영양의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자연에서 난 제철 식재료를 사용하고 음식물을 남기지 않는 발우공양 방식으로 사찰음식은 매우 친환경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보다 풍부하게 읽어본다면 미처 몰랐던 부분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요즘은 어디를 걷더라도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게끔 하는 포근한 날씨다. 새로운 눈으로 주변의 원더랜드(wonderland:신기한 것으로 가득한 동화의 나라)부터 하나씩 경험해 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