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조정인  오후 4시 역광을 받고 담벼락에 휘는 그림자는 목이 가늘고어깨가 좁다 고아처럼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타박타박 들어서는 골목 담장 너머엔 온몸에 눈물을 매단 듯,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저에게 들이친 폭설을 다 건너서야 가까스로 다다랐을 새 빛대추나무 앙상한 외곽에서 저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멀까잎새 한 잎, 침묵의 지문 맨 안쪽 돌기까지는 얼마나 아득한깊이일까 글썽이는 수액이 피워올린 그해 첫 연둣빛 불꽃까지는 ===============================================================  -새잎, 그가 내미는 위로와 공감의 말 봄이 되어도 유난히 더디 잎새를 피우는 나무가 있다. 감나무가 그렇고 대추나무가 그렇다. 특히 대추나무는 다른 나무가 이미 꽃을 피워내고 잎이 무성하도록 앙상한 몰골로 미동도 않다가 기다림에 지쳐, 혹은 기다림마저 잊었을 무렵에서야 글썽이며 여린 촉을 내민다. 왜 그리 늦게서야 왔니? 물을 새도 없이 솟아오르는 그 때의 감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화자는 삶에 지쳐 오후 4시 무렵 “목이 가늘고 어깨가 좁은” 역광의 그림자를 담벼락에 만들며, “고아처럼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 골목을 들어섰다. 그 때 의지할 데 하나도 없는 울적하고 막막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온몸에 눈물을 매단 듯,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이 담장너머로 얼굴을 내민다. 마치 “네 마음 내가 알지! 응 알고말고!” 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해두고 기다렸던 듯.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기에 피었기에 눈물을 매단 듯 피어났을까. “앙상한 외곽”(수피)을 가진 대추나무는 그에게 들이친 폭설이라는 신산과 고난의 먼 거리를 지나서 “가까스로” 새 빛, 연둣빛에 도달했을 것이다. “침묵의 지문 맨 안쪽 돌기”, “그해 첫 연둣빛 불꽃”이 이글거리는 그곳까지는 또 얼마나 아득한 깊이를 가졌을까? 그 거리와 깊이를 가진 대추나무 새잎이기에 고아 같은 화자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대추나무는 나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너무 손쉬운 성취는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래 기다렸기에 눈물처럼 글썽이는 작은 성취 하나를 받아들이는 감격이 더 애틋하다. 죽은 듯 죽지 않은 희망을 기다리는 일이 우리 삶에는 얼마나 많은가? 터질 듯 터지지 않은 꿈이 내게는 없었던가. 자연은 그런 깊이를 담고 와서 이 봄에도 새잎을 내밀어 우리들 막막한 심사를 달래준다. 대수롭지 않게 보는 이도 있겠지만 자연의 비의는 깊고도 깊다. 그러니 잎새 하나 피는 것, 꽃잎 하나 피는 것이 그렇게 기특하고 고마울 수가 없다. 물론 대추나무 누른 녹색의 취산화서(聚散花序)를 기다리려면 초여름까지 기다려야 하고, 달콤한 열매를 먹기까지는 한 계절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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