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우기 위해 입덧하던 봄의 기운들이 밟은 흙살 그대로 하늘 끝닿았는지, 천지에 사태진 봄을 한창 실어 나르다 몸살 앓는 꽃샘바람 치마폭 감겼다 풀어지는 햇살 사이 흩날리는 연분홍꽃잎 엄첩다. 연둣빛 엉켜 초록물 번져드는 나뭇잎사귀마다 숲의 풍경을 품고 가는 계절, 죽은 땅에서 소생하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황무지>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역설적 표현 방법을 읊지 않았을까! 절망의 날들을 용케도 견뎌 도려낸 상처마저 꽃물 든 목숨인양 꽃비로 잦아드는 연분홍꽃잎 아래 서성여보는 봄, 빈터의 무늬만으로도 황홀한 신라적 가람 터 숨은 천년을 캐 올리면 덩달아 그리워지는 유순한 詩 한 편 적셔짐이 아련하다.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화창한 봄 들녘, 구층목탑 허물어진 흔적으로 남은 심초석 처연한 몸 둘레로 꽃피는 봄날에 여울지는 황룡사지. 신라인의 거룩한 성지이며 호국불교의 위엄을 곧추세우듯 나라의 평온과 통일의 염원을 안고 제27대 선덕여왕 14년(645) 건립된 황룡사구층목탑, 고려 고종 25년 (1238) 몽고전란으로 폐사가 되기까지 600여년 가까이 서라벌의 위상을 높이며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던 위대한 대탑이었다. 진흥왕 553년 착공 이후 574년 금당의 장육존상, 선덕여왕 시절 구층목탑이 완공되기까지 93년 걸친 신라 삼보(三寶)로 우뚝 선 구층목탑의 상징성, 35대 경덕왕 13년 갑오(甲午754) 길이 1장 3치, 두께 9치, 구리 49만 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 당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기와 높이가 182㎝에 이르는 치미(鴟尾) 출토유물을 볼 때 웅장한 건물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선덕여왕 12년 (643)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져 청(請)을 올려, 1층 일본(日本), 2층 중화(中華), 3층 오월(吳越), 4층 탁라(托羅), 5층 응유(鷹遊), 6층 말갈(靺鞨), 7층 단국(丹國·거란), 8층 여진(女眞), 9층 예맥(穢貊), 아홉나라를 구층목탑 층층이 쌓아 적군의 세력과 침범을 막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던 것이다.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 소장(所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 하였다.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백제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 꿈에,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고 의심이 생겨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여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두 사람 자취 없이 사라졌다. 아비지는 공사를 중단한 것을 후회하며 탑을 완성 시켰다. 신라 삼보라 칭송한 황룡사구층목탑,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과(顆)를 탑 기둥 속에 봉안했고, 탑을 세운 이후로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 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함이 아니겠는가. 황룡사 장육존상과 구층목탑, 그리고 진평왕 천사옥대, 신라의 세가지 보배는 적의 침범도 막았기에 찬(讚)하여 말한다. 신령이 도와주어 서울에 우뚝하니 날아갈 듯 처마에 금빛 단청 빛나네 구층목탑 올라보니 어찌 구한(九韓)만이 항복하리오 천지가 평안한 뜻 여기에서 느끼네 일연의 삼국유사 설화를 간직한 황룡사 빈 가람터, 숨은 천년을 캐 올리는 봄날의 여심(女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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