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예쁘던 여자 친구가 오늘은 꼴도 보기 싫어졌다. 안된 일이기는 하지만,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일 중 하나다. 잠시 생뚱맞은 가정이기는 하지만 누가 길바닥에 침을 뱉어놨다고 하자. 미관상 아름답지 않다. 타인만 그렇게 느낄까? 아니다. 침을 뱉은 당사자도 그렇다. 그래서 웃기는 실험이 있다. ‘입 안에 든 침, 나와 어느 정도 분리되었을 때 과연 더럽다고 느낄까?’하는 약간은 엽기적인 실험이다. 결론은 10센티라고 한다. 그 이내라면 더럽다고 느끼지 않는데 그 너머라면 슬슬 더럽다는 느낌이 든다고 연구에서는 밝히고 있다. 참 이상도 하지, 같은 침인데 어떻게 거리의 차이로 더 정확히 말해 나와 분리되는 정도에 따라 다른 감정이 생기냔 말이다. 여자 친구 이야기하다가 잠시 삼천포로 새 버렸다. 예쁜 여자 친구가 미워졌다면 분명 이유는 있다. 가령 힘들게 겨우 구한 공연 티켓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말로 거절했을 수도 있고, 멋있게 차려 입었는데 살짝 속옷이 튀어나와 있다거나 활짝 웃는 이빨 사이로 뭔가 끼여 있는 걸 봤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예쁘다고 느낀) 내 여자 친구가 어떤 이유로 꼴도 보기 싫어지게 되었을까?’ 불교 인식론에서는 이런 상황을 해석하는 도구로 오온(五蘊)이라는 게 있다. 인식의 다섯 가지 단계 정도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쉽다. 색(色)온-수(受)온-상(想)온-행(行)온-식(識)온인 오온을 줄여서 색·수·상·행·식이라고 한다. 여기 오렌지 한 개가 있다고 치자. 색온(色蘊)이란 오렌지라는 대상이 가지는 특성이다. 색깔은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노란색이고 크기는 어른 주먹만 하고, 냄새는 톡 쏘는 게 아주 상큼하다는 등 ‘대상이 가지는 특성’이라는 의미에서 색온을 대상성(性)이라고 한다. 수온(受蘊)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수(感受)하는 단계다. 쉽다. 눈으로 오렌지를 바라보고, 손으로는 만져보며, 코로는 냄새 맡는 등 눈·코·귀·입 등 감각기관으로 오렌지를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과정이다. 그 다음이 상온(想蘊)이다. 상(想)이라는 글자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이, 오렌지[相]가 인식 주체의 마음[心] 속에 자리 잡는 과정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오렌지나 코끼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상온 때문이다. 다음이 행온(行蘊)인데 이 과정이 재미있다. 어려운 말로는 구집(構集) 작용, 쉬운 말로는 좋고 싫고의 판단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앞의 세 과정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 오렌지를 누구는 바나나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누구나 두 개의 눈으로 보고 하나의 코로 냄새 맡는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음속으로 오렌지를 떠올려보면 오렌지를 떠올리지 딸기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다 똑같다. 그런데 행온만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이다. 누구는 오렌지를 좋아하지만 누구는 귤만 못한 미국 과일이라고 싫어할 수 있다. 너는 왜 짜장면을 좋아하고 짬뽕은 싫어하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내 욕망에 따라 좋고 싫고가 생기는 거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식온(識蘊). 앞의 과정이 마음속에서 벌어진 것들이라면, 식온은 얼굴 표정 등으로 드러나는 표상화(表象化) 과정이다. 시쿰새콤한 오렌지 한 조각을 씹어보면 무슨 말인지 안다. 시어서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어깨가 경직되는 등의 구체화 과정이다. 마음속 좋고 싫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이게 다다. 난해하고 뭔가 심오한 불교 철학 이야기가 아니다. 오온은 매일매일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먹고 마시고 느끼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우리네 삶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놓았을 뿐이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오온은 이처럼 색온으로 시작되고 식온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식온은 다시 색온을 지향(志向)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색온으로 시작되고 식온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오온의 가장 큰 특징은, 식온이 다시 색온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림노래’ 구조라는 데 있다. 좋은 감정[識蘊]을 가지고 여자 친구[色蘊]를 바라보지만 공연 티켓을 뿌리치는 순간, 만정이 뚝 떨어져[行蘊: 흥, 네가 그렇게 잘났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좋다가도 싫어지기도 하지만 싫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지는 게 바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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