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하는 봄바람 너울에 실려 가로수길 환하게 벚꽃은 벙글고, 청보리 일렁이는 분황사 당간지주 길목을 따라 들어서는 오솔길 안쪽에 황룡사 절터가 훤하게 펼쳐진다. 지천에 봄꽃만개한 길섶, 끝난 듯 이어진 사잇길 끄트머리로 미탄사지 삼층석탑이 아담한 몸피 빼꼼히 내비쳐 그 무엇 기다리듯 먼발치 어렴풋하다. 텅 빈 몫의 여운만으로도 설레는 옛 터전에 다다르면 사계절 수시로 걸음 딛는 사유(思惟)의 발 디딤이 유유자적하다. “경주에 오면 제일 먼저 황룡사를 보라”는 주보돈 교수〈백제-신라 상생협력을 위한 충남-경북 문화관광해설사 교차역사문화탐방〉초청강의《호국 중심 사찰로서의 황룡사 位相과 그 변화》교재에 ‘황룡사가 여러모로 신라 최대·최고의 사찰이었음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사찰이 완공되어간 제반 과정은 문헌 기록으로 뚜렷이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런 실상의 대강은 장기간에 걸친 발굴을 통해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황룡사 이후 신라에서 겉으로 드러난 규모와 기능의 측면에서 그에 비견할 만한 사찰이 다시는 세워지지 않았다’고 논했다. 신라 삼보(三寶)중 두 개의 보물을 거머쥔 황룡사, 신라가 곧 불국토(佛國土)라는 신라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성된 위상 넘치는 걸작품인 1장6척의 장육존상,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의 침입으로 흔적 없이 불타지고 현재는 이를 받치던 석조대좌만 금당지에 남아 있는 설화를 따라가면 【삼국유사】 제3편 흥법(興法)·탑상(塔像),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 즉위 14년 계유년(癸酉553) 2월에 용궁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절로 고쳐 지어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하고, 기축년(己丑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에 닿았다. 배를 검사해보니 공문(公文)에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 5만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釋迦)의 존상(尊像)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 있는 나라로 가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부처 하나와 보살상(菩薩像) 둘의 모형(模型)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城)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불상(佛像)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 갑오년(甲午574) 3월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이 승하(昇遐)할 조짐이었다. 혹은 이 불상이 진평왕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진평왕 5년 갑진년(甲辰584) 황룡사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여왕 때에 첫 주지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讚)해 말한다. 속세(俗世)의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일세. *황룡사 장육존상에 대한 논의에서는 불상의 높이를 475㎝로 보거나 대략 5m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통일신라시대에 통용했던 당척(唐尺)이나 현재 사용되는 곡척을 적용하여 일장육척(一丈六尺)을 환산한 수치이기 때문에 황룡사 장육존상이 조성되던 진흥왕대에 통용되던 척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당척이 신라에 도입된 시기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점이기 때문에 574년에 조성된 황룡사 장육존상에 당척을 적용하여 불상의 높이복원을 시도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삼국시대 신라에 통용되던 척도는 고구려의 척도인 고려척(高麗尺)으로 백제와 일본에서도 공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황룡사 중금당지 발굴조사 때 주간 실측을 통해 도출된 용척은 길이가 35.666㎝ 내외의 고려척으로 확인 되었다. 황룡사 중금당지에서 도출된 고려척은 이후 검정통계 분석방법을 적용하여 평균치 35.790㎝로 보다 정밀하게 조정되었다. 따라서 황룡사 장육존상이 실제로 16척의 높이에 맞춰서 조성되었다고 가정하고 당시에 사용되던 고려척을 적용하면 불상의 높이는 570㎝ 복원되며, 이 높이는 기존의 추정치와 큰 차이를 보인다.*한정호 『황룡사의 新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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