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이날을 기점으로 일제 치하에 맞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경주에서도 3월 11일, 12일 밤 노동리 교회당(현 경주제일교회)에서 두 차례 비밀모임 끝에 13일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지만, 주동인물들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날의 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바로 이틀 뒤인 3월 15일 당시 작은 장이 열리던 노동리 봉황대에서 애국군중들의 태극기를 앞세운 독립만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경주에서 실제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은 바로 ‘1919년 3월 15일’이었고, 장소는 당시 작은 장이 서던 봉황대였다. 이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주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오는 16일 오후 2시부터 경주제일교회와 봉황대 잔디광장에서 열린다.
경주기독교연합회, 경주제일교회가 주최·주관해 열리는 행사는 1부 기념행사와 2부 3.1운동 재현 및 기념식으로 진행된다. 먼저 경주제일교회에서 기념예배를 시작으로 3.1운동 영상 시청, 경주 근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아라키 준 박사의 경주 3.1운동 관련 세미나가 이어진다.
특히 경주 3.1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던 박영조 경주제일교회 제2대 담임목사의 외손인 김광세(79) 장로와 박문홍 영수(현 안수집사)의 외손인 이봉천(52) 씨 가족 등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할 예정이다.
2부 행사는 3.1운동 재현을 위한 거리행진이 경주제일교회-화랑로-봉황대 앞 잔디광장까지 이어진다. 100년 전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인 봉황대에서는 3.1절 노래와 애국가 제창,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만세 삼창 등이 진행된다. 또 일제의 경주 3.1운동관련 공판 기록을 토대로 해 당시 상황도 재현된다.-기독교인들이 주도했던 ‘경주 3.15 만세운동’ 독립기념관 자료와 경주제일교회 90년사 등에 따르면 1919년 3월 15일 경주 만세운동은 당시 노동리 교회(현 경주제일교회)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이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1919년 3월 11일, 12일 노동리 교회당(현 경주제일교회)에서 박래영·윤기효·박문홍 세 사람은 뜻 있는 성도 5~6명과 비밀모임을 갖고 경주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김성길, 김술룡 등도 규합해 3월 13일 경주읍 큰 장날 거사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12일 밤 박문홍의 집에서 태극기 300개를 만들어 13일 새벽 동지들에게 배부했다. 이때 수상한 기미를 눈치 챈 경찰은 박내영과 조기철의 집을 수색했고, 각각 거실에서 태극기 2장, 30장이 발각됐다. 이로 인해 주동인물 박문홍 외 15명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13일 거사는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3월 15일 읍내 작은 장이 열리는 봉황대 주변에서 오후 3시 30분 박봉록, 서봉룡, 박무훈, 최성렬, 김억근 등 청년 30여명이 주도해 12일 밤 박문홍의 집에서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 때 장에 있던 장꾼들도 일제히 호응하면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독립만세 운동이 일자 경찰들은 곧바로 총검으로 위협하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인물들을 검거했다. 현재 경주시청의 수형자 명부에는 이때 검거된 주동인물 가운데 박영조·박문홍·김학봉·조기철 징역 10월, 이승태·최수창 징역 8월, 손석봉·최성열 징역 6월, 김성길·박봉록 징역 5월, 전성필·김천근 징역 4월, 김억근은 징역3월(집행유예1년)을 언도받아 각각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는 기록이 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모두 경주제일교회의 전신인 노동리 교회 박영조(호적 박래영) 당시 담임목사, 박문홍 영수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는 경주 3.15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에 있었던 것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오는 16일 열릴 예정인 ‘경주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경주기독교연합회와 경주제일교회가 주최·주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점득 경주제일교회 장로는 “경주 독립만세운동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재판기록이 있지만 기독교인이나 시민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향후 (가칭) 경주 3.1운동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립해 기독교, 동학, 애국군중 등이 참여한 경주의 독립 운동사를 정립하고, 독립운동사적지 정비 등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민족운동 신라고적환등회로 이어져 경주 3.15 만세운동은 1921년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留置)운동과 민족운동인 신라고적환등회로 이어졌다. 이번 기념행사와 함께 발간되는 논문집 ‘경주의 3.1운동 전개와 의의’에 따르면 경주 만세운동이 규모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항일 정신은 이후 일어나는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 운동, 신라고적 환등회가 전국적으로 이어져 독보적인 운동이 됐다고 평가했다.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 운동은 1921년 9월 일제에 의해 발굴된 금관총의 출토유물을 경복궁 내 총독부박물관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에 맞서 대부분의 유물들을 지켜냈다.
또 신라고적환등회는 경주 3.15만세운동 이후 하나의 민족정신을 깨우는 운동이었다. 1923년부터 전개된 신라고적환등회는 겉으로는 경주제일교회 부설 교육기관인 사립계남학교의 학자금 모금을 위한 것이었지만, 내면은 민족의 기원인 신라문화를 소개하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정신운동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동아일보 1923년 7월 7일자, 11월 19일자 등의 기사에 상세히 기술되기도 했다. 특히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운동과 신라고적환등회는 동아일보와 당시 경주청년회, 경주제일교회의 적극적인 관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동환 경주제일교회 담임목사는 “100년 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주 3.15만세운동은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유치운동과 신라고적환등회로 이어진 범시민 나라사랑 운동이었다”면서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숭고한 뜻을 경주지역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해 나가길 기원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