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 하나는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령 정보나 과학의 발전으로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그것이다. 예전에는 담배가 몸속 기생충들을 없앤다고 하여 약처럼 피웠다고들 한다. 생각해 보면 참 어이가 없지만 그 당시 어르신들은 아주 심각하게 따랐을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난다. 식사 후 달달한 커피가 당기는 분들은 커피 믹스 껍질을 돌돌 말아 티스푼 마냥 쓰곤 했다. 왠지 상남자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건강에는 아주 안 좋다. 이런 것들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예다. 명절 선물로 잘 주고받는 스팸 세트도 마찬가지다. 외국 어느 육가공 공장에서 햄을 만들고 남는 돼지고기 어깨살을 처리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게 스팸이라고 한다. 돼지의 어깨살과 햄(Shoulder of Pork And haM)의 머릿글자를 따 만든 스팸은, 가격이 저렴하고 조리하기에 편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스팸 메일’이라는 단어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스팸의 위상이 이상하리만치 한국에서는 고급 대접을 받는다. 연기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다가 짭조름한 스팸 한 조각 얹어먹으면 이런 밥도둑이 없다 해서 집집마다 아주 인기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설이나 추석 명절에 곧잘 손에 들려 있는 선물 세트 중 하나다. 이런 모습이 신기했던지 외국인들이 올린 관련 영상들이 제법 있다. 스팸 메일이라는 단어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스팸의 위상이 이상하리만치  한국에서는 고급 대접을 받는다 연기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다가 짭조름한 스팸 한 조각 얹어먹으면  이런 밥도둑이 없다 해서  집집마다 아주 인기다 흔히 다리를 떨면 복(福)이 나간다고 배워왔다. 나 어릴 적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듣던 잔소리인데 요즘은 내가 아들 녀석한테 심심찮게 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거나 나름 머리를 쓰면서 하는 작업을 할 때 그러는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남에게 안 좋게 보일 수 있다 싶어 주의를 주곤 했는데, 이 또한 그때는 맞는데 지금은 아닌 경우인가 보다. 미국 심장협회(AHA)는 심장병 증가의 주원인으로 요즘 현대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좌식 문화를 꼽고 있다. 오래 앉아 있으면 피가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하니까 다리가 쉬이 붓거나 수족냉증이 생기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심장으로부터 내려온 혈액을 다시 심장 쪽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정맥을 둘러싼 다리 근육 역할이 필수적인 우리의 신체 구조다. 그래서 심장협회는 다리떨기를 그 좋은 대안으로 제안한 것이다. 제2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다리 종아리를 열심히(!) 떨어줌으로써 혈액의 원활한 순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껌의 긍정적 기능은 간과한 체 ‘껌 좀 씹는다’ 하면 왠지 공부 안 하는 날라리일 것이라는 선입견과도 같은 맥락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숨 쉬기도 짚고 넘어가자. 흔히 어른이 뭔가 시킨 일이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하기 싫을 때 애들은 한숨을 쉰다. 당연히 어른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다. 그러나 한숨을 잘만 쉬면 남의 오해는 살지라도 오히려 본인의 폐 건강에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 번만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크게 쉬는 숨이라는 의미에서 제대로 쉬는 한숨은, 가령 폐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은 오히려 폐 건강에 좋다고 한다. 어째 느낌상 과거는 죄다 잘못되었고 극복의 대상처럼 비치는 것 같아 균형을 잡는 걸로 이야기 끝을 내면 좋겠다. ‘그때는 맞는데 지금은 틀린’ 이란 말은 어쩌면 초등학교 때 찍은 사진 같은 개념 아닐까 싶다. 화려한 꽃무늬 셔츠,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그리고 어색한 웃음까지, 뭐 하나 촌스럽지 않은 게 없지만, 어디 가서 놀림당하라고 어머니가 입혀 준 옷과 헤어스타일은 아니지 않나? 그 당시로는 최선의 선택과 가장 세련되었던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금과 다를 뿐이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란 말이다. 집집마다 옛날 사진을 안 버리고 고이 모셔놓은 이유는,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그렇다고 현실만을 절대 긍정하는 것도 아닌, 그저 “아,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린 거야?” 하는 삶을 바라보는 존재론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 태도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만큼 융통성이 있고 다양하게 변주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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