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의 둥굴마을(杜陵.둥구리)은 곡산한씨 집성촌이면서 이름난 선비들 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경주 중심가를 벗어나있고 경주최씨의 영향력이 컸던 내남면의 사족들은 혼반(婚班)을 통해 서로의 지위를 유지·계승하였고, 이익(李瀷)의 성호학파(星湖學派)계열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출입이 잦은 곳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관직 의존도가 높았고 현실의 변화와 경세치용의 학풍에 치중하였으며, 정치적 격변에 다양한 처신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경주선비 곡산한씨 둔옹(遁翁) 한여유(韓汝愈,1642~1709)는 처사적 삶과 경학중심적 삶을 살면서 지역의 후학양성에 매진한 경주의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둔옹선생은 주역에 능통하였고, 상수(象數)ㆍ병진(兵陣)ㆍ음률에 밝았고, 사후에 “학문을 좋아하고 견문이 넓었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好學多聞 事親至孝]”며 표창하였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서인(西人.노론)과 근기남인(近畿南人)이 대립하던 당시 1679년 경주 포석정 부근에서 유배 길에 오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직접 만났으며, 이 일로 그의 후손들 가운데 일부가 우암계의 노론성향을 띄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우암 사후에 곡산한씨를 비롯한 경주의 일부 유림들이 우암선생을 기리기 위해 인산서원(仁山書院)을 건립하면서 1725년 계림사화를 유발시킨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남남인의 땅에서 노론임을 드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며, 정치적 시류에 따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한여유의 행적은 경주의 학문경향을 연구하는데 중요하며, 이후 한시유·한필용·한필제·한문건 등 노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이어서 등장하며 지역의 유림들과 활발한 교유를 하기에 이른다. 사헌부지평 추증 이후 1787년 향인들이 두릉서사(杜陵書社)를 짓고 후학양성과 배향을 담당하면서 지역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 1830년 간행된 『둔옹집』은 경주를 중심으로 간행되면서 여러 향인들이 동참하였고, 그 가운데 족손(族孫) 석강(石岡) 한문건(韓文健,1765~1850)이 노론측 인물들과 연관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문집이 편찬되었고, 당시 경주부사 일와 김노응(1757~1824)이 「행장」을, 매산 홍직필(1776~1852)이 「서문」 등을 지어 힘을 실었다. 한문건이 정리한 『年譜』에 의하면 “정조년간 정미년(1787) 향인들이 선생이 머문 곳 두릉에 사당을 세우고, 다음 해 무신년(1788) 서사에서 제사의 예를 행하였다. 전 진사 몽암 정희(1723~1793)가 글을 지어 도왔고, 전 지현(知縣)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이 일을 기록하여 걸었다. 두릉서사라 편액하고, 보인당(輔仁堂), 진학재(進學齋)·거경재(居敬齋), 유의문(由義門)이라 하고, 봄가을 하정(下丁)일에 향사를 지냈다”며 두릉서사의 내력을 소개한다. 당시 여강이씨 약남 이헌락은 내남의 두릉사를 찾아 참배하고 학자의 본분과 학문의 연원에 대해 탐구하면서 선생에 대한 존경과 두릉사에 대한 내력을 글로 옮겼다. 그는 18세기 영남남인으로서 관료적 삶을 산 인물로, 여강이씨 농재(聾齋) 이언괄(李彥适,1494~1553)의 후손이며, 부친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신중(李愼中)·모친은 경주최씨(慶州崔氏) 최덕기(崔德基)의 따님이다. 1748년(영조24) 학행으로 천거되어 강릉참봉이 되었고, 평양봉사를 거쳐 의금부도사와 사포서별제를 지냈으며, 1766년 하양현감·1776년 익위사익위를 거쳐 상의원주부·함창현감 등을 지냈다. 영남남인의 숙명적인 처사문인을 벗어나 서울중앙 정계에 진출한 그는 18세기 영남남인의 암울한 시기를 벗어나고자 노력하였고 탄압받는 남인의 처지에서 글을 남겼다. 특히 경주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노력하였는데, 고려 때 명신 익재 이제현을 모신 구강서원 사액(「구강서원청액소(龜岡書院請額疏)」)을 주도하였고, 「두릉현사기(杜陵賢祠記)」 등을 지었다. 또 저서인 『약남집』은 약남선생의 부친 이신중이 우암 남구명의 문인이었던 인연으로, 1850년 영양남씨 후손 치암 남경희(南景羲)가 편집·간행하였고, 금강산을 유람한「동행록(東行錄)」·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유록(九月山遊錄)」등 유기문학도 다수가 전한다. 두릉서사 건립에 발맞춰 유림의 일원으로 문집편찬과 인물선양 등에 많은 향인들이 동조하였고, 약남선생 역시 두릉서사 보인당을 찾아 소회를 읊조렸는데, 다음 회차에 두릉서사의 보인당기(輔仁堂記-李憲洛)를 번역해 소개하도록 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