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는 【삼국유사】 제3권 흥법편(興法篇) 흥륜사 법당에 모신, 동쪽 벽 뒤로 서쪽을 향해 앉은 소상,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 서쪽 벽을 등지고 동쪽으로 향해 앉은 소상,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열명의 성인 중 한분인 신라의 위대한 승려이며 사상가인 원효대사가 ‘화엄경소’ ‘금광명경소’등 수많은 저술을 남기며 교학을 펼친 법성종의 근본도량이다. 원효의 성은 설(薛)씨 압량부(경산)의 남쪽 불지촌(佛地村)밤나무골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육부촌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중 한 성(姓)씨다. 15세 황룡사에서 출가 유학길 도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진리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 모든 진리는 마음가짐에 달렸다.’라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 불교사상의 융합과 실천을 장엄하게 펼친 한국 불교의 첫 손에 꼽히는 고승(高僧)이다. 원효가 하루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게 빌려 줄 것인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을 것이다” 외치니 사람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 당시 태종무열왕에게는 홀로된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혹시나 분황사에서 법문 할 당시 서로 마음이 통했지만 혼례를 치를 수 없는 승려신분이기에 술기운 빌려 간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도 그 심중을 알지 못할 때 태종무열왕은 그 속내를 짐작했다고 한다 “아! 원효가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한 자식을 두고 싶어 하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賢人)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뜻을 알아챈 왕은 궁의 관리를 시켜 원효에게 문천교(蚊川橋)라고도 불리는 느릅나무다리 유교(楡橋)를 건너면서 물에 빠지게 해 그 젖은 옷을 요석공주 거처인 요석궁에서 말리며 머물게 했다. 요석공주와의 사랑에서 태어난 분이 신라 10현(설총·최승우·김언위·김대문·박인범·원질·거인·김운경·김수훈·최치원)의 한사람인 설총이다. 【삼국사기】“설총은 성품이 총명하고 영민하여 스스로 도술과 방언(方言)으로서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니 당나라 시대의 육경(六經)인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춘추(春秋)·악경(樂經)을 해독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지금(고려)까지 학자들이 그를 높이 받든다. 뛰어나게 글을 잘 지었지만 세상에 전해오는 것은 없고 남쪽 지방에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마멸되고 떨어져 나가 글자를 읽을 수 없으므로 그의 문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전한다. 6두품의 신분으로 경사(經史)에 박식했고 집대성한 향찰 한문표기의 음과 훈(訓새김)을 연구 편찬해 모든 백성이 두루 쉽게 사용하게 풀이한 글 이두(吏讀)로 가르쳤다. 역사에 빛이 된 훌륭한 후손을 둔 원효의 파계는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막힘이 없다. 계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박을, 형상에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 있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어야 생사의 편안함, 곧 장애와 간섭 없이 자유로움에 이르는 것’이라 설했다. 그리하여 원효는 교화의 한 방법으로 목이 굽고 허리가 잘룩한 조롱박 모양의 도구를 만들어 무애라 두드리며 자라처럼 움츠리고 곱사등을 굽히며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소매를 휘저으며 가난뱅이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민초들에게도 부처님의 뜻과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리게 해 남녀노소 귀천 없이 대중불교의 가르침을 얻게 교화했다.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대중화하는 공헌에 거리낌 없는 획을 그었던 것이다. 원효가 신문왕 6년(686) 70세로 입적하자 그의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가루로 찰흙에 섞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날마다 공경의 절을 했는데 그 효에 감동해 옆으로 돌아보는 모습의 소상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동방의 성인임에도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알려지지 않으니 매우 안타깝다” 고려 숙종 6년(1101) 8월 왕이 시호를 내리고 명종(1170~1197)때 건립한 화쟁국사비가 비석의 몸돌은 없어지고 받침돌이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추사 김정희가 확인하고 복련(覆蓮)이 새겨진 직육면체 받침석 윗면에 차화쟁국사지비부(此和諍國師之碑蹟) ‘이것은 화정국사의 비석 받침이다’ 친필로 음각했다.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의 첫새벽을 깨우는 원효의 철학과 사상, 분황사 도량석 천년을 이어가는 법등행렬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