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장마가 계속되고 있지만, 비가 그치고 나면 까실까실한 햇살이 축쳐진 나뭇가지를 들어올리고 어디론가 숨어버린 풀벌레들도 다시 불러내리라. 다소 불편스럽긴 하지만 길지 않은 장마는 여름이란 계절을 더욱 여름답게 하는 것도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며 성동동 동사무소를 찾았다.
지난 3일 이루어진 경주시 인사에서 경주에서는 처음으로 여성동장이 된 최정임(53, 성동동장)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성동동사무소 2층에 마련된 10평 남짓한 동장실은 승진을 축하하며 각계에서 보내온 화분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최동장은 각종 현황파악에 여념이 없는 듯 책상 가득 쌓인 서류더미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경주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성동시장의 환경정비에 대한 방안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어릴 때 피아니스트가 꿈]
“차부터 한잔합시다”
잎녹차를 손수 달여서 내 놓는 넉넉한 모습. 오십 초반의 여성으로서는 큰 키(165cm)에 부자집 맏며느리 같은 모습. 그러나 그는 아직 미혼이다.
“2천가구 5천8백여명의 동민들의 심부름꾼”을 자처한 그는 경주에서 태어나 계림초등, 경주여중고를 졸업했다. 사무관으로 승진하고 첫 부임지인 이곳 성동동이 본적지이며 고향이기도 하다니 누구보다 그 감회는 남다를 것이었다.
아버지가 중소기업(엿 공장, 직물공장 등)을 경영했던 덕분에 다소 부유한 가정의 세 자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의 꿈을 가슴에 품고 자랐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진학마저 포기해야 했고 1971년에 공무원이 되었다.
33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세무과, 가정복지과, 부녀복지계, 지정계 등 많은 업무들을 맡아보았지만 76년도부터 7년간 황남동에 근무하면서 영세민, 모자가정 등 어려운 주민들을 자주 접하면서 공무원으로서의 보람을 몸으로 느꼈던 기억. 95년 시·군 통합으로 여성복지회관 서무계에 있으면서 여성들의 진로와 희망사항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던 점. 지적과에서 새주소사업을 하면서 건물번호판을 공공근로자들과 같이 골목골목 다니며 직접 부착하던 일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공무수행을 자신의 일처럼 성실하게 해온 것이 오늘의 결과에 이른 것 같았다.
[주민화합이 최우선과제]
"동장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주민들과 시의원의 협조 아래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그걸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동장 발령을 받고 무엇보다 우선적인 문제는 주민화합이라는 생각으로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동을 쭉 다 돌아보았다"
지역 자생단체 대표들을 찾아가 열심히 할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체육회이사회 산업시찰 가는데도 동행했다. 주민의 협조를 얻는 게 최우선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1통, 2통은 상대적으로 낙후하고, 도로포장, 주민휴식공간, 재래시장환경정비 등 다양한 민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동장답게 이미 주민들의 민원과 숙원사업들을 모두 파악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고민에 이미 몰입한 상태였다.
"동장은 심부름꾼, 시장님의 뜻을 받들어 주민들의 바람을 전달하고 이루어지도록 가교역할에 충실하는 한편, 계획에 끝나지 않고 실천하는 동장이 되겠다"
성동시장 환경개선사업을 건의해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것이고 경주의 관문이기 때문에 좀 깨끗하게 정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성실한 업무자세뿐 아니라 언제나 공부하며 나아가는 노력파인 그는 대구산업정보대학 경영과를 96년에 졸업한 만학도 이다.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대구전출을 생각하기도 할 정도였다.
2000년도에 3개월 코스의 국가공무원 연수원에서 여성공무원 간부양성과정을 수료한 게 인연이 되어 지금도 그 인맥들이 전국적으로 네트웍을 형성. 많은 정보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여성들의 진로를 향상시키는 그런 교육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조금은 보수성이 강한 경주에서 여성동장을 발탁한 백상승시장님의 생각을 들어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간략히 옮겨보기로 한다.
(경주인구의 반이 여성인데 여성을 전담할 기구나 관리자가 없어 앞으로 여성시대를 맞아 경주시가 여성관리자를 키워두지 않으면 어렵다. 여성동장을 이번 기회에 한사람 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서열이나 평점이 아주 높은 여성 공무원이 추천되어. 동장으로 발탁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2, 제3의 여성동장이 나올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할 책임과 사명감으로 어깨가 무겁다고도 했다.
[평생을 어머니 봉양한 효녀]
지금도 불교를 신앙하고 있는 그는 태어날 때 이미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딸만 둘이었던 어머니에게 동네 할머니가 ‘평생 당신을 봉양할 자식을 얻을 테니 백율사에 가서 기도하라’고 권유했다. 몇 번이나 거듭되는 이 할머니의 채근에 못 이겨 그의 어머니는 백율사를 찾았고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백일기도 끝에 얻은 자식은 아들이 아니라 또 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99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봉양해 결과적으로 아들이상의 역할을 한 효녀이다. 때문에 결혼을 안 했는지도 모른다.
"결혼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지 필수조건은 아닌 것 같다."
"아직 인연을 못 만나서 못한 것 같다".
50년을 어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특별히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이 살았고 외롭다거나 큰 어려움이 없었다. 99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좀 허전하고 했지만 일이 있어 그 자리를 대신해주었다고 했다.
[욕심내기보다 버리는 연습]
"현직에 있는 동안에는 열심히 일해서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고, 퇴직 후에는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욕심은 없으며, 혼자 생을 잘 마감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전부다. 지금은 욕심내기보다는 자꾸 버리는 일을 한다."
주위에서 양자를 들이라는 권유도 받지만 그것도 욕심이라는 생각. 자식을 끼고 살기보다는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누구든지 도우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내 것에만 애착을 가지는 이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스트레스를 잘 받지는 않지만 대체로 혼자서 해결하고 차를 몰고 여행을 하든지 책을 읽으며 풀어버린다고 했다.
자기잣대로 남을 보지 말고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풀어간다면 세상은 이해관계로 얽히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는 마무리 말을 들으며 몇 시간의 만남이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마 지난 뒤에 세상을 골고루 말려주는 햇살처럼 앞으로 성동동에 뜨겁고도 강렬한 햇살이 비칠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