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형산강을 따라가면 강동면 유금리에 1695년(숙종21) 지방유림의 공의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동강서원(東江書院)이 자리한다.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이 1716년에 쓴 「동강서원기」를 보면 “을해년(1695) 봄에 형산강 위에 터를 잡고, 정해년(1707) 가을에 묘우와 강당을 이루고, 이해 10월 정미일에 처음으로 향사를 지냈다. 진사 이계(李洎)가 맨 먼저 일을 추진하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죽고, 진사 임인중(任仁重)이 계속해서 낙성하여 동강서원이라 이름하니, 아! 아름답도다(『梅湖先生文集』卷5,「東江書院記」,乙亥春 相址于兄江上 丁亥秋 廟宇及講堂成 是年十月丁未 縟儀克擧 鄕進士李洎 首事未就而歿 進士任仁重 繼之成 號東江書院 猗歟休哉)”며 서원 창건내력을 기록하였다. 특히 이계는 밀암(密庵) 이재(李栽,1657~1730)의 인연으로, 임인중은 경주출신이자 혼반(婚班)의 인연으로 일을 도왔다. 서원건립 이후 사액을 받기 위한 노력이 다분하였고, 손중돈의 10대손 손성덕(孫星德,자 漢五)은 몇 달 동안 대궐 문 앞에 엎드렸으나 상소가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 승정원에서 몸이 상할 것을 우려해 ‘날이 이처럼 뜨거우니 물러가게 하라’며 하교하였는데, 이 사실을 성호 이익의 문인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는 「동강서원의 사액을 청하다가 뜻을 못 이루고 영남으로 돌아가는 손한오에게(孫漢五 星德 以其先祖景節公仲暾 東江書院請額事 有疏籲之擧 累朔伏閤而未及登徹矣 政院傳上敎以日熱如此 使之退去 故漢五將歸嶺南 索別詩於親知 聊以應之)」라는 이별시를 남겼고, 서원은 아쉽게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당시 서원건립과 실기편찬 등 중요한 일을 도맡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우재선생의 6대손 노잠(魯岑) 손여두(孫汝斗,1643~1713)이다. 그는 경주 양좌동(良佐村)에서 출생하였고, 손소-손중돈-손경-손광현-손병-손종도-손현-손여두의 가계를 구성하며, 업적으로는 ‘경절공실기(景節公實紀)’ 1책과 ‘영모록(永慕錄)’ 1책을 편수하고 보첩(譜牒)을 정비했으며, 저서로는 ‘노잠집’ 2권이 전한다. 손중돈의 부친 손소(孫昭)와 점필재 김종직은 동문수학의 관계로, 훗날 김종직이 손소의 묘갈명을 짓는(‘佔畢齋集’ 卷2, 「雞川君孫公墓碣銘」) 등 사림의 두터운 우의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손중돈에 대해 전하는 서적이 없어 사림의 학맥을 논하기에 아쉬움이 많았다. 이에 손여두가 약간의 유문(遺文)과 사실(遺事)들을 모으고, 1815년 9대손 손윤구(孫綸九)와 종손(宗孫) 손성덕(孫星德) 등이 수집하여 초간하고, 이후 일부가 증보되어 1905년에 `우재선생실기(愚齋先生實記)`가 중간되어 전한다.
“처사 손여두가 독서하는 여가에 성심으로 추원감모(追遠感慕)하여 집에 있는 문자와 타처에서 나온 문자를 수집하여 연보(年譜) 한 질을 만들고, 제문과 만사 등을 부록하여 밀암 이재에게 왕복하면서 교정하여 동강서원에 감춰둔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금년 겨울에 그 아들 손시완(孫時梡)이 발섭하여 멀리 나(권상일)에게 찾아와서 그 일의 전말을 적어서 장차 새긴다고 하였다. 나는 감히 감당할 수가 없으나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생은 일찍이 우리 고을에 목사로 오시어 성북에 유애비가 있고, 단구에 향시하는 곳이 있으니, 이 실기가 한 서원에만 사사롭게 소장되지 않고 세상에 널리 반포되어 오래된 실적으로 하여금 인몰되지 않도록 한다면 한갓 후학의 다행일 뿐 아니라 실로 우리 상주(尙州) 백성들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책 끝에 써서 돌려보낸다” 윗글은 ‘우재집’ 「실기서문(實記序文)」 으로 손시완이 부친 손여두의 유지를 받들어 실기편찬 의도를 밝힌 글로, 1741년 상주 근암리(近嵒里) 출신인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이 적었다. ‘청대집’ 권10, `경절공연보부록권말(景節公年譜附錄卷跋)` 과 내용이 동일하며 당시 권상일은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상주 백성들을 위해 애쓴 우재선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흔쾌히 서문을 써 주었다. 본 글은 2015년 『동방학문학』64집에 발표된 「우재 손중돈의 김종직 문인설 고찰-우재선생실기 편찬과정을 통해서」을 참고한 것이다. 손중돈은 경주학의 대표적 인물이자 회재 이언적의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연구가 미흡한 상황이며, 서원과 묘갈명이 존재하기에 그 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후손에게 달렸다. 또한 우재학은 회재학이 등장하는 초석이 되기에 지금이라도 제대로된 연구가 이뤄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