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 부처님의 형상은 우리 인간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그중 크게 다른 점이 32가지로 이를 32길상(吉相)이라고 하고, 이를 세분한 것을 80종호(種好)라고 한다. 이 32길상 가운데 ‘부체유연세활(膚體柔軟細滑) 자마금색(紫磨金色)’이라는 것이 있다. 부처님은 ‘피부가 부드러워 곱고 매끄러우며 최고급의 사금인 자마금빛이 난다’는 것이다. 또 80종호에는 ‘사변광각일장(四邊光各一丈)’이라 하여, 부처님 몸에서 나온 빛이 사방으로 일장(一丈, 약 3m)씩 뻗어 나간다고 하였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몸에서 스스로 자금색 빛이 나서 일장이나 나가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므로 석가모니의 몸은 무영(無影)이며 그를 모신 탑이기에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둘째, 불국사 석가탑이 하짓날 정오에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한다는 설이다. 즉 하지를 전후한 날 정오에는 석가탑의 그림자가 탑의 기단 안에 머물러 탑신의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탑신의 그림자는 탑의 기단 그림자 속에 들어가 기단의 그림자만 보일 뿐 탑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도록 고도의 천문학적 계산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석가탑의 위치 선정과 건조물의 치수 등을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정오에 탑신의 그림자가 기단 그림자의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과학적 계산과 기술적인 시공으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탑 축조 당시부터 이 탑을 ‘무영탑’이라고 한 까닭은 탑신의 그림자가 지면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說)이다. 셋째, 『불국사고금창기』 ‘서석가탑(西釋迦塔)’조 기록에 의하면 석공은 이름이 없는 당나라 사람이고, 석공을 찾아온 사람은 누이인 아사녀(阿斯女)인데, 불국사 남서쪽 10리 지점에 있는 못에 석가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무영탑이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오사카 긴타로(大板金太郞) 등의 『경주의 전설』(1927년) 중 영지(影池) 부분에서는 아사녀가 누이에서 부인으로 바뀌었고, 탑 그림자가 영지에 계속 비치지 않아 아사녀가 투신하고, 석공은 부인을 닮은 부처상을 조각한 후 투신한다는 비극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뒤이어 1938년 7월부터 현진건이 이를 바탕으로 동아일보에 ‘무영탑 전설’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1941년 장편 ‘무영탑’을 발간한다. 이 소설에서 현진건은 석공의 이름을 아사달이라 하고 아사달과 아사녀는 당나라 사람이 아닌 백제 사람으로 설정했다. 이 석가탑은 창건 이후 원형을 잘 보존하여왔으나, 1966년 도굴범에 의해 탑이 훼손되어 그해 탑신부를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2층 탑신석 윗부분에 뚫린 사리공 안에서 일련의 사리장치유물(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당시 탑에서 나온 유물로는 금동제사리외함, 은제사리내·외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금동방형사리합, 경옥제곱은옥, 청동제비천상, 동경 등이 있고, 그 외에 묵서명방형지속이 있다. 그 밖에 직접 사리 용기로 쓴 파리제사리병, 향목제 장경사리소병, 은제소대, 금제소합 등이 사리가 든 채로 사리 장치와 함께 탑 안에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금동제 사리외함에 유향 3봉이 비단에 쌓인 채 발견되었는데 이 유향은 아프리카 소말리아반도와 아라비아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오만 등지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발견된 『무구정광다라니경』은 길이가 약 650cm, 폭이 6.5-6.7cm의 세련된 서체로 인쇄된 두루마리 형태였다. 이 경전에는 당나라 측천무후가 만들어 사용하던 신제자(新製字)가 4종 10자가 포함되어 있어 서지학자들은 이 다라니경이 측천무후 사망 직후(705) 인쇄되었다가 후에 탑 안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제가 특정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신제자는 대개 그 황제가 죽은 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인쇄본은 770년경에 조성된 일본 법륭사의 백만탑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있다. 위 사실을 근거로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경과 함께 나온 묵서지편 중수기 판독문에 의하면 석가탑의 최초 완공 연대는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대이며 고려 초인 1038년에 석가탑을 중수했다. 따라서 이때 다라니경이 안치됐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이 경이 700년대 초에 중국에서 번역되고 인쇄된 후 신라로 보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종이가 신라산이 확실할 뿐만 아니라 이 경을 쓴 먹이 신라 산으로 그 제작 연대가 8세기 초이기 때문에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임이 확실하다는 주장에 공감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