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플러 씨   - 이규정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 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아래 각을 맞추는 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사열되어 제왕에 예의를 갖추듯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 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卷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 구름은 종이 한 장 차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따악, 그 소리 일침으로 조용히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 -사자 아가리보다 게걸스런 스테이플러의 식욕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쓰는 도구는 아마 복사용지와 함께 스테이플러일 것이다. 작은 서류 뭉치는 어김없이 따악, 하는 스테이플러로 철해진다. 순식간에 책상은 그 작은 서류들로 너절해진다. 책장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은 그 스테이플러에서 발상을 얻어 그 의미를 자본주의 사회 일반으로 확장시킨 다. 그만큼 시에서는 사소한 사물 하나에서 출발한 발상이 중요하다. 이는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스테이플러”가 아닌 “스테이플러 씨”라고 함으로써 도구화되고 획일적이며 개성을 잃은 창백한 개인을 지배하는 어떤 장치며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스테이플러의 입에 걸리면 “펄럭이는 팔과 다리”의 속성을 잃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함구시”켜져 “손발을 맞추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얼굴들은 속수무책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단정하다고 했지만 실상 스테이플러는 사자 아가리보다 더 게걸스런 입을 가졌다. 그가 소화 못 할 건 아무것도 없다. 뜬구름 같은 허황한 내용도 솜사탕처럼 달콤한 언약으로 바꾸어버리니(“솜사탕과 뜬 구름은 종이 한 장 차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 어떤 스테이플러 씨에 의해 소화되고 있는 걸까. 그걸 생각이라도 하며 사는 것일까. 이 시는 의심하고 회의하지 못하며 자신의 개성과 목소리를 잃은 채, 같은 염기서열로 규격화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작은 사물 하나로 잡아낸 패기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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