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선생이 경주를 떠나 대구여고를 거쳐 경남여고, 1966년에는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했다. 이듬해인 1967년, 그해 2월에 부산예총회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부산대학병원으로 운반 도중에 운명했다.
그 이듬해인 1968년 가을에 청마시비가 경주 토함산 등산로 입구에 세워지게 되었다. <현대문학사>에서 전국 문인들에게 모금하여 경주문인협회가 주관이 되어 토함산 등산로 입구 논바닥에 세워졌는데, 늦가을이라 논바닥에는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서울에서는 당시 <현대문학사> 주간인 조연현(趙演鉉) 선생과 백철, 청마의 동향인인 문덕수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내려왔고 원형갑 선생은 대구로 가시고 그 때 경주문협지부장은 성학원(소설가) 선생이었다.
경주의 문인들로는 성학원, 홍영기, 김정식, 김영식, 오경환, 박주일, 이근식, 이종룡, 전문수, 최용석, 정용원, 김홍주, 이오덕, 서영수 정민호 회원들이었고, 또 대구에서 원현갑, 전상렬, 서울에서 김해석, 박종우, 선생도 참석하였다.
경주에서는 경주문인협회가 ‘시비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준비를 서둘렀는데 수월(水月)선생이 기획을 맡았고 글씨는 서예가 계전(桂田) 최현주 선생이 썼으며 새겨진 청마의 시는 ‘석굴암대불’의 한 부분이 선택되었다.「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누었나니」 이 ‘석굴암대불’은 모두 16행의 4연으로 되어있는 시인데 평론가 원형갑 선생의 선택으로 2줄만을 떼어다가 새긴 것이었다. 원형갑 선생의 글씨가 워낙 악필(惡筆)이어서 ‘한개 돌로’ 를 ‘함께 돌로’ 로 오기(誤記)하여 주었기에 서예가 계전(桂田) 최현주 선생이 그대로 돌에 새기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중요한 시비에 글자 한 자가 잘못 새겨진 사실을 수많은 문인들이 제막식에 참석하여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년이 흘러갔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