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서당은 양동마을, 여강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1835년(현종 1년)에 세워졌다. 본디는 마을 동쪽 안계리에 있었는데 1970년에 안계댐이 건설되며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그래서 양동마을에는 3개의 서당이 남아있다. 수몰된 안계리는 지금은 안계저수지로 포항시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청정지역이기도 하다. 경산서당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회재선생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을 기리며 수업을 하던 곳이다. 서당이름인 경산은 《시경》에 나오는 〈은무〉(殷武)의 “저 경산에 오르니 소나무와 잣나무가 곧디 곧다.(陟彼慶山 松柏丸丸)”란 구절에서 유래한다. 대대손손 옮기지 않을 조상의 사당을 만들 튼실한 재목을 구한 산이 바로 경산이므로 선조를 기리며 그의 뜻을 받들겠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다. 지금의 경산서당은 안골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처음부터 자리를 잡아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옮겨짓다 보니 다른 건물에 비해 입지 뿐 아니라 구성도 뭔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 정문인 구도문(求道門)은 서원이나 향교처럼 3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안락정이나 강학당과 비교해 보아도 생뚱맞기 그지없다. 보통 사당이 있어야만 3문을 짓는데 비해 경산서당에는 사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3문이 있어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주자의 말씀에 “도(道)는 사물의 바른 이치로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다.(事物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배우는 학생들에게 道는 현실에 존재한다고 느껴야만 실천할 수 있고 마음과 행동이 진실하고 올바른 경우에만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강당은 이선당(二善堂)으로 대청 가운데 칸의 벽에 현판이 걸려 있다. 이선(二善)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무릇 효자는 조상의 뜻을 잇고 사람의 일은 전례에 따라 행한다(夫孝子 善繼人之지 善術人之事者也)에 ‘어질다’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에서 따왔다. 이는 효를 실천했던 무첨당의 생애를 밝힌 것이다. 이번에는 강당의 동쪽 방인 보인재(輔仁齋)를 살펴보자. 그 뜻은 《논어》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로 “벗이 있어 인을 돕는다(以友輔仁).”는 뜻으로 사람과의 관계, 특히 동료, 친구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뜻으로 친구의 중요성을 말한다. 벗이 서로 ‘선을 요구하면(責善:책선, 친구끼리 서로 옳은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 덕이 날로 나아가 참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강당의 서쪽 방은 심경재(尋敬齋)로 주역에 나오는 구절인데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정돈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뜻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또 그 상태를 유지해야만 학문에 매진할 수 있다고 한다. 서당의 동재는 가운데 마루를 두고 남북으로 방이 있다. 남쪽 방은 학진재(學眞齋, 배움의 길은 여러 가지 있다. 배우는 이가 목표를 잘못 잡으면 평생 향인(소인)이 됨을 면치 못한다) 즉 배우는 자는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북쪽 방은 양지재(兩止)로 시경에 나오는 두 ‘지(止)를 말한다.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 길을 가는도다(高山仰止 景行 行止)” 이처럼 옛 선인들은 도(道)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배우는 자는 죽은 이후라야만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경산서당의 강당이나 마당에서 앞을 바라보면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600년 세월동안 양동마을의 수많은 인물들이 성주봉을 보면서, 오르면서 마음으로 다짐했을 많은 생각들은 곳곳에서 빛을 발하겠지... 햇살 따스하게 비춰드는 경산서당의 겨울은 그래서 더 따뜻할 것 같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