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은 문화재청에 ‘경주불국사삼층석탑’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석가탑 중수기에 의하면 혜공왕(재위 765-780)대에 세워진 탑으로 탑명이 ‘불국사무구정광탑’으로 되어 있다. 또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절한 전설에서는 ‘무영탑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이름이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논어』「옹야(雍也)」편에 ‘質勝文測野(질승문칙야) 文勝質測史(문승질칙사)’라는 구절이 있다. ‘질박함이 우아함을 누르면 촌스럽고 반대로 질박함을 잃고 꾸밈이 과하면 내실이 없다’는 뜻이다. 석가탑은 이 구절에 부합하는 단순함과 우아함을 모두 갖춘 멋있는 탑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탑은 지반을 다지고 그 위에 탑을 세우지만 석가탑은 기단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 암반 위로 그랭이기법을 적용하여 지대석을 깔았다. 이는 영축산의 암반 위에서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그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대석 위에 2단의 기단을 쌓고 3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올린 석탑으로 신라 석탑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탑이다. 석가탑은 전체적으로 치밀한 계산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1, 2, 3층의 몸돌의 폭은 그 비율이 점차 축소되지만, 높이는 2,3층은 비슷하고 1층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는 이 탑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상승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지붕돌의 경우에는 높이보다 폭을 줄임으로 전체적으로 탑의 안전감을 도모하며 경쾌한 느낌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붕돌 끝의 반전을 통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기단부나 탑신부에 모서리기둥[우주(隅柱)]과 버팀기둥[탱주(撐柱)] 이외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절하여 균형이 잡히고 지극히 안정된 느낌을 준다. 목조탑파의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초기의 석탑들과는 완전히 달라진 신라식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탑이다. 상륜부는 보륜 윗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1966년 석가탑을 해체 보수할 때 전라북도 남원시 소재 실상사삼층석탑 상륜부를 모방해서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사를 창건한 때가 828년(흥덕왕 3)이므로, 이 탑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석가탑보다 조성시기가 늦은 이 탑의 상륜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실제 상륜을 보완하기 이전에 비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석가탑의 둘레에는 팔방금강좌라고 하는 별도의 탑구(塔區)가 있다. 탑구란 탑이 신성한 구역임을 보여주는 구조물로서 사찰의 회랑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긴 장대석을 놓아 탑구를 정하거나 큰 돌을 일렬로 놓아 탑구를 구획하는 다른 사찰의 탑들과 달리 석가탑에는 정사각형의 탑구 네 모서리와 네 변의 중심에 원형의 둥근 연화좌대를 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하여 경계를 삼는 특이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다른 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며 독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8개의 연화좌대 사이에는 2개씩 장방형 돌로 연결하여 탑구(塔區)를 설정하여 놓았는데 이것이 불국사 고금창기에서 말하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坐)이다. 이는 청정한 성역인 탑의 구역을 표시한 것으로 각각의 연꽃은 보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두 8명의 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협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팔부신중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호위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