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芬)은 흰연꽃 또는 연꽃이 활짝 핀 상태 -깨달음의 형체를 의미, 분타리(芬陀利) 백연엽 흰색잎이 100개. 모란꽃 공주님 김덕만 신라27대 선덕여왕(632-647) 3년(634) 창건된 왕실사찰 분황사.*당간지주(幢竿支柱) 꼿꼿하게 드리워진 천년몸돌로 저문 계절이 내미는 햇살이 느슨하다. 빈 들녘 틈새로 흩어지는 억새의 여운이 간공(杆孔)의 둥근 액자에 담겨 겨울길목의 운치를 한 움큼 당겨놓고 있다. “억새는 흔들리면서 풍화한다. 바람에 흩어져 꽃씨를 퍼뜨리는 초겨울의 풀들은 가볍다. 풍화의 운명이 무겁고 쓰라릴수록 그 모습은 가벼워야 옳으리라. 그러나 가벼움을 완성하고, 가벼움 속에서 풍화되어 죽어가야 하는 운명의 내면은 가볍지 않다” -김훈 ‘풍경과 상처’ 신라적 명분이 확실한 분황사당간지주, 쳐다볼수록 다소곳이 마주선 자태가 천년을 타고도는 사랑처럼 다정도 하지만, 장대석 뻣뻣한 척추의 뼈마디로는 서로 부둥켜안을 수 없어 어쩌면 쓸쓸하기도 하다. 그 옛날 통신수단이 만만치 않을 당시 먼발치에서도 백성들이 하늘높이 펄럭이는 깃발만 보고서도 사찰의 행사를 짐작케 했을 알림이 역할의 표본물,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지금의 관공서 앞에 설치된 게양대 역할쯤 상상하면 무방할 것이다. 사찰행사가 열릴 때 당간지주 높이 흰깃발이 펄럭이면 오늘은 큰스님 법문이 있는 날이구나, 붉은 깃발이 하늘 향해 치켜세워져 있으면 임금님 행차를 알아차리는, 백성들과 소통의 한 방편으로 몸돌 가득 소박한 품새 비스듬히 깎아지른 반듯한 기품은 절의 위치를 돋을새김 하기에 당당했을 것이다. 천년세월 꼼짝없이 분황사 문 앞을 알리는 푯대 당간지주, 지주의 양쪽 끝은 둥그스름하게 유연함을 주었고 바깥쪽의 양모서리를 접어 약 1.7m 높이에서 잘록하게 빚었다. 당간을 고정하는 3개의 뚫은 간공 구멍으로 둥글게 말아올린 풍경이 잽싸다. 간주 틈새 사이로 꽉 끼여 비켜설 틈 없이 버텨온 간대(竿臺) 돌거북, 당간의 받침돌로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목을 움츠린 몸피 등에는 거북 등무늬(龜甲文)가 없으며 천년숨결 버틴 자태가 대견스럽다. 돌기둥 사이 꼼짝 않고 숨어있다시피 하는데 오른쪽 앞발 왼쪽 뒷발이 깨어져 안타깝다. 지상 높이 3.6m 두개의 화강석 맞기둥이 70cm 간격을 두고 마주하는 모습은 서로 바라만보아도 정겨움이 묻어나기에, 몸 맞닿아 살 부비지 않아도 긴 세월 서로 위안의 몫으로 그 자리 지켜주고 있나 보다. 신라 56왕 중 재임기간이 박혁거세(재위 61년) 다음으로 길게 나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재위 54년), 성골의 남아선호 사상에서도 딸을 등극시킨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통찰력 그리고 권력과 세력을 휘두르지 않고 백성이 믿고 따르는 덕망과 지혜로 소통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 흰연꽃이 활짝 핀 분타리(芬陀利) 향기로운 임금님의 절, 나라의 번영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한 선덕여왕의 불심, 진흙탕 속 지핀 연꽃향기 고스란히 담긴 왕실의 원찰 분황사. 사찰의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로 변함없이 제 몫을 곧추세우는 당간지주 올 곧은 자태, 천년을 거슬러 또 천년 발길 놓은 그대로 그 자릴 지키며 세파에 흔들려도 앞서거나 뒷걸음치지 않고 박 힌 걸음 뿌리 채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동국대 김영태 교수론(論)*사찰에서 법회나 행사가 열릴 때 의례를 알리기 위해 깃발을 높이 세워 달았는데, 당(幢)이라는 깃발 또는 괘불(掛佛)을 거는 기둥이 당간, 이 당간을 고정 시키기 위해 세우는 두 개의 기둥이 당간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