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정은 1780년에 세워진 서당으로 양동마을 어귀인 성주봉 기슭, 양동초등학교 맞은 편 언덕위에 자리한다. 마을에서는 외진 곳에 지어 자손들을 빼어난 환경 속에서 공부시켰다. 안강들을 지나 경주 가는 길, 형산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편안해 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곳으로 동북쪽으로는 인동리와 연결된다.
안락정은 이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과 더불어 양동마을을 대표하며 안락정 손영순의 후손들이 매입하여 정자로 삼았다. 안락정은 “내가 편안해 하는 것은 농부들의 편안하기 때문이요, 내가 즐기는 것도 그들의 즐거움이다.(吾所安者 野人之安 吾所樂者 野人之樂)”이라고 한 말에서 ‘안(安)’과 ‘락(樂)’에서 연유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더우기 마을에서 바라보는 넓은 들판과 아름다운 산은 편안해지는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유교에서는 편안(安)해야 어질고(仁)’, 즐거우면(樂) 도리(義, 옳고 의로움)와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안락은 행복(happiness)으로 사람의 행복은 말과 행동이 같아야만 느낄 수 있듯이...
안락정은 건물의 앞쪽과 양옆은 반듯하게 담장을 쌓고 뒤로는 풍수해를 막기 위해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옆에는 성주봉을 향하는 길을 내었다. 건물은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일자형 건물을 지었는데 가운데는 넓은 마루를 두고 양가에는 온돌방을 둔 것이 서원건축과 흡사하다. 건물은 학교의 기능에 알맞게 한 것으로 본다. 건물 앞은 전체적으로는 툇마루를 깔고 대청 뒤에는 쪽마루를, 방 뒤쪽은 벽장을 달아냈다. 필요에 따라서는 방문을 열어 전체가 다 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지었다. 이는 ‘따로, 또 같이’란 말처럼 건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바로 현재의 건축이 본받아야할 요소가 아닌가 싶다.
양반가의 집이나 정자에 현판이 없을 수 없다. 대청 앞면에는 ‘안락정’, 뒤벽 가운데는 ‘성산재’가 있는데 그 뜻은 ‘안락정은 성주봉 아래에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방문위에는 ‘성산팔경(聖山八景)’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안락정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칠언절구로 가을의 밝은 달, 새벽기운, 해오름,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을 때, 고기잡이배, 철도, 들판의 농부들을 주제로 삼았다.
‘술선당(術先當)’현판을 살펴보자. ‘술’은 ‘잇다’란 뜻으로 ‘선인들의 덕을 잘 이어 간다’는 의미로 문중어른들의 뜻을 잘 받들겠다는 각오를 나타내고 있다. 동쪽방인 사검실(師儉室)은 사마천이 쓴《사기》〈蕭相國世家〉에 나오는 말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나라(秦)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친구이자 재상으로 한나라의 개국공신중의 하나인 ‘소상국’을 말한다. 유방이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논공행상을 할 때 전장에서 공을 세운 무신들이 자신들보다 문신인 소상국을 으뜸으로 인정하자 유방은 ‘사냥할 때 들짐승을 잡는 것은 사냥개지만 개 줄을 풀어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사람’이라며 소하의 역할을 짚어주었다.
그 후 한나라가 통일이 되자 소하는 집은 외딴 곳에 두고 담장도 짓지 않았다. 그리곤 ‘후세가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배우고, 어질지 못해도 세도가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後世賢 師吾儉不賢 毋爲勢家所奪’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조선 말기가 되면서 어지러운 사회상, 관리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것을 풍자하는 듯하다. 마당 한 쪽에는 석가산(돌을 모아 산 모양으로 만들어 정원의 일부로 구성, 조산으로도 부른다.)을 두어 생활공간을 신선이 사는 듯 꾸몄다. 고개를 들면 담장밖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호위하듯 안락정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예전과는 달리 안락정의 넓은 마루에 올라도 반겨주는 벗도 한명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윤동주 시인이 어릴 적 친구들을 그리워하듯 나도 학창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마음만 맞으면 열차타고, 버스타고 도심을 벗어나곤 했던... 마을입구에는 역사도 없어 외로움에 떠는 양동마을역이 있다. 한때는 붐볐던, ‘칙칙폭폭...’ 굉음에 귀를 막던, 지금은 외롭다 못해 말라가는 곳에 스며있는 친구들의 따뜻한 온기... 철길 옆, 이름 모를 들꽃과 코스모스는 바람에 흩날리고... 올 한해도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