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나정(蘿井)은 시조 박혁거세 탄강설화(誕降說話)가 얽힌 곳으로 천년 신라의 상징성을 갖는 공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여기저기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加里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전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셋째의 취산과 넷째의 무산(茂山) 순서가 다르게 기록한다.  또 『삼국유사』「기이(紀異)」에는 “노례왕(弩禮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으니, 양산촌은 급량부(及梁部) 이씨, 고허촌은 사량부(沙梁部) 최씨, 대수촌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 정씨, 가리촌은 한기부(漢岐部) 배씨, 고야촌은 습비부(習比部) 설씨로 신라 여섯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전한다. 조선에 이르러 선왕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종묘를 제안하며, 시조를 모신 조선 팔전(八殿)을 전국의 탄강지에 설치하였는데, 팔전 가운데 무려 경주에만 3곳(숭덕전:박혁거세, 숭신전:석탈해, 숭혜전:미추왕)이 존재한다. 앞서 신라의 종묘 제도는 제2대 남해차차웅 3년(6)에 처음으로 시조 박혁거세의 사당을 세웠고, 제22대 지증마립간 때 시조의 탄강지인 내을(奈乙) 나정에 신궁(神宮)을 건립하였고, 제36대 혜공왕 때 5묘(廟)와 제37대 선덕왕 때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고 전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신궁이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9년(487) 2월에 신궁을 건립하였다 전하고,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 역시「영동사(詠東史)」에서 “신라 혜공왕이 처음으로 5묘를 세웠다.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가 되고,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는데 큰 공덕이 있어서 불천위(不遷位)가 되어 조묘(祖廟)와 예묘(禰廟)까지 합쳐서 5묘가 되었다. 박씨는 아달라왕에서 그치고 벌휴왕부터는 석씨와 김씨가 번갈아가며 즉위하였다”며 신라왕의 사당건립과 변천에 대해 언급하였다. 하지만 신라건국의 핵심배경인 6부촌장에 대해서는 국가적 대우와 국민적 관심이 매우 미비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6부촌장을 모신 사당이 건립이 추진되었는데, 양산재는 신라건국이념의 실천과 상징적 의미를 갖는 소중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박정희대통령 시절 1970년 김창곤 경주시장이 국가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신라 시조의 탄강지 나정 주변에 6부촌장을 모시는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78년 다시 시장직을 역임하면서 10여년의 오랜 기간을 거쳐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올해 초에는 추가로 강당을 건립 중에 있다. 당시 최숙 보존회장과 회원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건립에 맞춰 1981년 한학에 조예가 깊은 내남의 류석우(류시민의 백부)가 기문을 적었다. 필자 역시 6부촌장을 기리기 위해 그 기문을 풀이하여 소개한다. 양산재기(楊山齋記) 도읍의 사람들이 그 땅에 육부의 촌장을 위한 사당을 세우려고 논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김창곤 경주시장이 뜻을 논의하고 협력하여, 경술년(1970) 가을에 공사를 시작했다. 박경원 내무장관과 김수학 경북도지사도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고, 국비와 도비를 얻어 공사를 도왔다. 제사는 시의 도움으로 비로소 제사를 지냈는데, 신해년(1971) 가을부터 기미년(1979) 봄에 공사를 마쳤다.  사당을 ‘입덕묘(立德廟)’라 하고, 삼국유사의 “덕이 있는 자를 왕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다(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에서 뜻을 취하였다. 신문(외삼문)을 ‘홍익문(弘益門)’이라 하고, 단군의 홍익인간에서 뜻을 취하였다. 정문을 ‘대덕문(大德門)’이라 하고, 중용의 “대덕을 구현하는 자는 반드시 명을 받는다(大德者必受命).”에서 뜻을 취하였다.  동재·서재를 ‘익익재(翼翼齋)’라 하고, 시경 대아편의 “대대로 빛이 나는 밝은 덕이여, 그 계획 그 생각이 이루어지네(世之不顯 厥猶翼翼).”에서 뜻을 취하였다. 당을 ‘윤적당(允廸堂)’이라 하고, 서경 고요모의 “진실로 그 덕을 따르라(允迪厥德).”에서 뜻을 취하였다. 전체를 ‘양산재’라 이름하였으니, 지명을 따랐다. 하루는 보존회장 최숙(崔淑)이 이 일은 오직 우리 고을의 성대한 일일뿐 아니라 진실로 나라의 역사와 백성의 떳떳함과 관련있기에 기문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글이 부족하지만, 다만 간략하게 그 일의 전말을 갖추노라. 단기 4314년(1981) 4월 풍산 류석우 삼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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