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격동의 시대에도 붓 놓지 않아… 70여 년 화업 통해 한국화단에서 뚜렷한 족적 남겨
파란만장한 질곡의 역사속에서 향토적인 사실주의 지향 일상 속 친근한 풍경과 서민들 애환 따스하게 그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숱한 고난의 시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원로 작가 조희수 화백(92, 1927~)을 남산자락의 배동 자택에서 만났다. 지금도 자택 겸 화실에서 검박하기 이를데없이 생활하고 있는 조 화백은 척박한 시대의 가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꿋꿋이 활동한 작가로 한국화단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1927년 출생으로 일생을 화업을 위해 투신한 조희수 화백을 두고 ‘경주예술학교(1946년 4월 설립된 남한 최초 본격적인 예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경주 서양화단의 원로작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산증인’, ‘서양화 1세대 작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등의 수사가 따라 다닌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경주 출신 작가인 황술조, 손일봉, 김준식, 박봉수의 뒤를 잇는 작가로 영남의 화단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주예술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인수, 박기태, 이수창 등과 함께 굵직한 자취를 남긴 20세기 한국 화단의 중심에 있었던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다. 조희수 화백은 파란만장한 질곡의 역사속에서 향토적인 사실주의를 지향한 원로작가 중 한 사람이다. 리얼리티의 진실함과 서민들의 애환을 따스한 심성으로 바라보는 예술적 시각을 가진 조 화백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일상 속의 친근한 풍경을 주로 담아냈다.
선생의 화업이 이룩한 진폭과 진동은 지역화단뿐 아니라 한국화단에서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후진들을 통해 그 맥놀이의 파장이 진하게 전해지고 있다. 경주의 문화부흥을 위해 화려한 꿈을 꾸었던 경주 1세대 근·현대 미술 작가의 맥이 오늘에도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그 중심에 조희수 화백이 건재한 것이다. 선생의 존재만으로도 경주 화단은 든든하다고 후진들은 입을 모은다.
최근 경주예술학교가 경주에서 그 위상이 정립되고 부각되고 있는 차제에 선생의 화업과 작품들에 대해 소홀함이 없었는지, 다시 재조명되고 심도있게 연구되길 바래본다. 인터뷰에 동석해주신 최용대 선생께 감사드리며 선생의 화업과 삶을 기록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그림에 대한 노력은 곱절, 국전 9회의 입선 이루며 변함없이 사실화 고수 전 포항시립미술관 박경숙 학예사는 ‘선생은 어렸을적부터 그림에 대한 감각과 열정이 남달랐고 가난한 환경이었기에 그림에 대한 노력은 곱절이었다. 화가가 되기 위한 집념은 20대 젊은 시절 어려운 서울생활 속에서도 직장생활과 작업을 병행하면서 국전 9회 입선이라는 놀라운 이력을 쌓았다. 이것은 한국화단사에 있어서 큰 수확이었으며 조희수 화백의 대기만성형 화가의 기질을 엿볼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생은 1956년부터 1970년까지 꾸준하게 국전에 도전해 입선했다. 1974년부터 1988년까지 목우회에 출품했고 1980년부터 1987년 국전 초대전 등의 화업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1950년대 한국화단은 근대미술에서 현대 미술로 넘어가는 이행과정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태동과 함께 추상미술을 표방하는 진보적 성향을 기울이던 과정이었다. 이러한 한국 화단의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선생은 6회의 개인전, 국전 9회의 입선, 1977년부터 한국적 리얼리즘의 자생적 단체인 목우회에 출품하며 변함없이 사실화를 고수했다.
경상북도 미술협회 창립에 애썼으며 (사)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사)한국미술협회 경북도지부장, (사)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초대 지부장도 역임하며 작업 활동과 함께 경북지역 미술문화 발전에도 충실했다.
박경숙 학예사는 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선생은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연주의 서양화가로 한국의 자연, 특히 경주를 소재로 한 풍경화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1950년대 초기작은 판자촌 등 빈민가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어두운 갈색 톤이 대부분이다. 이후 중기 1960~80년대에는 왕성한 작업량을 자랑했는데 풍부하고 농익은 다양한 색채와 안정감 있는 구도를 특징으로 한 작품을 그렸다.
조희수 화백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소탈함과 자연스러움, 따뜻함이다. 전형적인 조희수 화풍은 대상에 대한 명확한 객관적인 관조와 구도의 확실한 안정감, 일상 속의 따뜻한 풍경 등을 들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기에 많은 이들의 정감을 자극한다고 평했다.
-“원체 실력이 출중해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 선생은 안동 출생(그간 경주 출생으로 알려졌지만 안동이었음을 새로 알아냄)으로 어렸을적 경주로 온다.
“월성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폐결핵에 걸려 죽는다고 호적엘 올리지 않으셨어. 그래서 당시 초등학교 5학년때(당시 학생보다 4년 위) 해방 직전 계림보통학교 전시에 출품했는데 이 당시가 19살 정도였어”
또래 학생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는 그림에만 몰입했다고 하며 1943년 제1회 경주향토미술제를 통해 지역 화단에 등장한 것인데 선생은 이 전시에 ‘계림’과 ‘불상’ 두 점을 출품한다. 후자는 2미터가 넘는 소묘 작품으로 재료가 없어 폐건전지에서 분리한 흑연심을 이용해 그렸고 액자 없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공중에 띄워서 설치했다고 한다. “‘불상’이라는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 학교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떼어 가버렸어. 연필도, 종이도 귀하던 시절이었지. 큰 종이가 없어 연결해서 그린 대작이었어”
또래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는 “급장도 하고 선생들과 나이가 비슷했었어. 그러니까 왕초였지, 하하. 당시 나무를 잘라 나무판에다 그림을 그렸어. 학교 공부보다 땅에 그림 그리는 것이 마냥 좋았어”라며 기억의 한 자락을 전했다.
선생은 스무살이 넘어 1946년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한다. “중고등학교 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원체 실력이 출중해’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귀국과 지역의 지주 및 재력가의 후원 등으로 향토예술인 및 전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운집해 문화 예술적 역량이 한껏 고조되었던 경주에서 본격적인 미술을 접하게 됐던 것. ‘후기인상파의 두목으로써 알리어 졌으며/ 또한 표현의 대담호장한 작가로서도 이름이/ 높다. 그는 원시 예술적 간소한 선과/ 색채로써 대담한 표현을 시도하다./ 음악, 무도 등의 작품은 그의 영향을(경향)/ 표시한 대표작이다.//’ -조희수 화백의 경주예술학교 재학 당시 노트 중에서(마티수(후기인상파) 불란서 화가). 홍익대학교 이애선 교수는 ‘선생의 경주예술학교 노트를 살펴보면 미학 과정 등 이론공부를 엄격하게 한 흔적이 있으며 미학의 경우 대학원 수준을 능가할 정도의 공부를 한 성실한 학생이었음을 알수 있다’며 선생의 성실성을 높이 평한 바 있다.
“폐병을 앓아 몸도 허약하고 작았지만 국전에선 내가 제일 먼저 입선(1956)했지. 모든 것이 앞서갔어”
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선생은 밀양 밀주국민학교에서 4년간 임시로 일했는데 거기서 유화를 처음 제작하게 됐다고 한다. 1949년 그린 ‘밀양 영남루’는 선생의 최초 유화작품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학교는 군병원이 되고 병원장 추천으로 군복무로 미술 관련 업무를 하게 된다. 장교 한 사람이 국방부에 추천해 1953년부터 근무했고 1956년 국전에 출품한다.
이후 부산의 수정초등학교에서 정식으로 근무하다가 휴전 후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생활 당시 판자촌 등을 그리는 등 여러 작품을 그렸다.
-오로지 현장에서 직접 사생 추구했던 선생은 바쁜 서울 생활속에서도 경주를 틈틈이 찾으며 묵묵히 경주 화단 지켜 “가장 활동을 왕성하게 한 시기는 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후반 정도일 것이다. 전업 작가로 접어든 것은 7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아이 넷을 그림을 그려 먹여 살렸어. 그런데 공짜로 그림을 주기도 했었지. 그런 그림들을 고향 경주에서 지금도 만날 수 있어”
선생이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경주로 내려 온 것은 거의 70대였다고 한다. 최용대 선생은 “그 전에도 수시로 경주에 내려오시고 장기간 작업을 위해 경주에 체류하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일일이 지도하기보다는 중앙 화단의 분위기 정도를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했다.
노스탤지어, 고향 경주를 향한 향수 때문에 경주를 더욱 즐겨 그렸다는 선생은 그래서 국방부 재직중에도 휴가만 얻으면 꼭 경주에 내려와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서울 살때 신라미술대전이 열리는 기간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심사위원을 모시고 경주에 가서 심사했지. 그리고 박수근 선생도 경주에 모시고 내려온 적이 있었어” 그러면서 점차 경주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포항에서도 거주하며 포항미협을 창립하고 지부장을 역임한다. 오로지 현장에서 직접 사생을 추구했던 선생은 바쁜 서울 생활속에서도 경주를 틈틈이 찾았고 1980년대 포항에서 잠시 머물렀던 생활을 제외하면 묵묵히 경주 화단을 지켜왔던 것.
포항에서 다시 경주로 1984년 지금의 배동 집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난 돈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웃음). 한때는 ‘무소유’ 라는 편액을 걸어놓은 적도 있었어. 예술가는 돈을 몰라야 돼. 그래야 그리지. 1977년 경주에선 처음으로 전람회를 했었는데(경주백화점) 당시 완판을 기록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 그때 집 한 채 샀으면 좋았는데 말이야” -에피소드... 누군가 선생의 작품을 칼로 찢어버린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특별히 작품을 힘들게 하진 않았던 것 같아. 글쎄,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작품은 없어. 무조건 조건 없이 그렸어”라는 대목에서 최용대 선생은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살짝 귀뜸했다. 선생의 나이 60대 후반 즈음, 서출지에서 제자들과 사생할 때 작품을 그리는 도중 그 작품을 정자의 빈방에 넣어놨는데 어떤 정신 질환자가 그림을 밭에 내다버린 일, 안동에선 마을에 사는 사람이 선생의 작품을 칼로 찢어버린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고 전했다.
또 양동마을과 안동하회마을을 그리기 위해 3년동안 양동마을에서 지내기도 하고 4년여를 경주에서 안동을 오가며 작업했던 적도 있었다. 방을 얻어놓고 밥 부쳐 먹으면서 현장 작업을 하기도 했다. ‘나 혼자 작업하느라 돌아다녀서 가족에게는 늘 미안했다’며 가족과 떨어져서 하는 현장 작업은 요새는 생각도 못할 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나친 지도는 내 작업과 닮아가기 마련이어서 일체 하지 않았어”...“나 ‘조희수’ 라는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작품 없다고 생각해” “제자들은 선생이 따로 지도하기보다는 분위기만 잡아주면 돼. 그것이 제일 중요해. 손을 대주는 식의 지나친 지도는 선생의 작업과 닮아가기 마련이어서 일체 하지 않았어. 각자가 알아서 개발해야지”
“개성이 각자 다른 후학들에게 굳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없어. 단지, 경주 화단 분위기가 후원해주는 풍토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야. 맘 놓고 제대로 그릴수 없잖아. 우리때는 그렇지 않았거든. 해방직후 한국전쟁 당시의 혼란기에도 작가 후원회가 있었어. 경주 기관장 등 지역 유지들이 후원했지. 후원자 명단이 빽빽할 정도로. 명단 만으로도 화가들에겐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됐지”
현대 미술의 흐름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장르도 있어야 하지. 미술은 다양하게 발전 과정을 거치고 새로운 흐름이 나오니까. 사실주의가 배경이 돼 있는 가운데, 그래야 발전이 있지. 서로 경쟁도 되고. 새로 나아가야지. 추상미술이 내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거세서 ‘쳐졌구나’ 하고 느낄때도 있었지만 흔들림은 없었어”라고 했다.
“나는 다작을 했는데 후회스러워. 제대로 된 작품이 없는 것 같아서. 내 씨(종자)를 남겨 두지 못했으니까. 알맹이가 없다는 거야. 나 ‘조희수’ 라는 정체성 즉, 개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지”라고 말하는 선생은 선생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며 한없이 몸을 낮추었다.
최용대 선생은 “식사하고 돌아서서 그리고, 커피 드시고 붓 빨고 그리고, 선생님이 젊었을때는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셨습니다. 가족을 돌보지 못할만큼이셨지요” 라며 열정적인 작업 당시를 설명해 주었다. 선생이 절필한지는 5~6년전 부터라고 한다. 1981년 그린 ‘양지마을’이라는 작품을 다시 그리는 중(리메이크)이었는데 아직 미완성인 채로 화실 한 쪽에 있었다.
최용대 선생(서양화가, 경주미술사수석연구원)은 “당신의 남에게 대하는 부드러운 성품과 자신의 무욕한 생활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무언의 행동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개인적으로 그림 세계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앞으로도 경주 미술계에는 큰 기둥으로 계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조희수 화백은…개인전은 1976년 1회 서울미술회관을 시작으로 1991년 6회 포항 아솜터 갤러리 초대전, 2016년 경주솔거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등 7회를 가졌으며 단체전은 1956~1970년 국전출품 9회 입선(경복궁미술관), 1968~1973년 미술단체 신기회에서 활동, 1974~1988년 미술단체 목우회에서 활동, 1984년 현대미술 초대 작가(국립현대미술관), 1985~87년 아세아 현대미술초대(일본 동경), 1993년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기념 초대전(예술의전당), 1996~97년 대한민국 원로작가초대전(서울시립미술관),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현대미술 초대, 2017년 ‘계림, 신화의 숲’ 전(경주예술의전당) 등을 가졌다.
1989년 제30회 경북문화상, 2003년 경주시 문화상에 빛나며 현대미술초대작가,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경북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사)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미술협회 경북도지부장, (사)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초대지부장,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조희수 화백을 만난 그 후… 삼고초려 끝 가슴 벅찼던 독점 인터뷰
필생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걸어온 조희수 화백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지역문화예술의 자부심이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선생과의 인터뷰라니...,
선생은 진홍색 베레모 차림이었다. 색감과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은 화려한 상의를 입었는데 노구임에도 유난히 그 세련된 멋은 감춰지지 않았다. 기분좋은 혈색을 지닌 선생의 얼굴빛이 그리 맑을 수가 없었다.
근황부터 여쭙자 두통약, 위장약 등의 약봉지들을 수북하게 보여 주신다. 마당의 꽃은 ‘그대로 살려만 둔다’고 하는데도 소박하고 정연했다. 부쩍 심해진 난청으로 공식적인 행사에는 선생의 모습을 보기 어렵지만 대여섯 명의 후배 작가들과는 매월 정기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있다고 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한 생애에 걸친 선생의 이야기를 어찌 다 기록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으랴. 많은 예술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었지만 내내 가슴 뛰는 벅찬 인터뷰였다. 선생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하는 고심이 앞섰고 부담도 컸음을 고백한다. ‘본지 독점’이라는 말을 던질수 있는 만큼 책임도 막중했다. 선생과의 인터뷰 성사는 4~5년여 삼고초려 끝에 얻어낸 값진 선물과도 같은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한사코 말씀을 아끼고 몸을 낮추며 완강하게 몇 번인가 인터뷰 제의를 고사하셨기 때문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최용대 선생(서양화가, 경주미술사수석연구원)이 바쁜 일정에도 기꺼이 동석해 주었다. 때로는 필담이 오갔고 때로는 목청을 돋워 질문하는 바람에 인터뷰가 끝난 뒤 목이 살짝 갔지만 기분은 몹시 뿌듯했다. 그간의 청을 기꺼이 허락해주고 긴 인터뷰에도 성심껏 대답해주신 조희수 화백님께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과 함께 정원을 짧게 산책하면서 잡다한 이야기도 나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6시에 잠자리에 들고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간다는 선생은 매일 아침 삼릉까지 왕복 30분여를 걷는다고 했다. ‘용대(최용대 선생) 바쁜데 자꾸 부려 먹어서 미안해’라며 지척에서 선생을 보살피는 제자도 알뜰히 챙기셨다. 선생에게는 화려하고 거창한 수식어가 따르는데 결코 그 표현들은 과장이 아니었다.
기억 저편의 일들을 회상하고 끄집어내는 선생의 말들은 그 자체가 기록이었다. 본 기사에서는 기본적인 자료 이외에는 선생의 육성을 그대로 실으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