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 서울 모 병원에서는 이색적인 장례식이 열렸다. 입간판에 ‘나의 판타스틱 장례식’이라고 되어 있고 식장은 꽃과 풍선으로 채워졌다. 전립선암 말기 판정을 받은 김병국(85)씨의 소위 ‘생전(生前) 장례식’ 모습이다. 평소에도 장례식은 따로 하지 않고 산골(散骨)하기를 바라던 김씨는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부고장(訃告狀)을 보냈다고 한다.  “죽은 다음 장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임종 전 지인과 함께 이별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검은 옷 대신 밝고 예쁜 옷을 입고 함께 춤추고 노래 부릅시다” 그 뜻에 공감한 조문객들은 검은색 옷 대신 분홍색 셔츠, 꽃무늬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김씨도 환자복 대신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그들을 맞이했다. 기력이 부쳐 병실로 돌아가기 전까지 두 시간 동안 김씨는 조문객들과 따뜻한 웃음과 마지막 포옹을 나눴다고 한다. 노령 인구가 많은 일본에는 이런 생전 장례식 문화가 활성화 되어 있다고 한다. 2017년인 작년 건설기계 쪽으로 대기업인 고마쓰의 안자키 사토루(安崎曉) 전 사장이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암이 발견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남은 시간을 Quality of life(삶의 질)를 우선시하고자 연명 효과는 있겠지만 부작용이 의심되는 방사선이나 항암제 치료는 받고 싶지 않다…”  역시 살아있는 동안 신세를 진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경우 죽음을 준비하는 이러한 활동이 2010년대 들어 활발해졌다고 한다. 장례식 준비를 미리 해두거나 주변을 정리하며 실질적인 임종 준비를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비해 연명치료를 할 것인지, 장례 절차는 어떻게 할 것이며, 지인에게 전달할 편지 등 엔딩노트도 유행이란다. 이를 ‘슈카쓰(終活)’ 사업이라 해서 현재 시장 규모가 연간 10조 원대 정도란다. 이처럼 삶과 죽음, 특히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원래 초상(初喪)에서부터 소·대상(小·大祥)에 이르는 상례(喪禮)가 되었건, 주검을 묘지까지 운송해 매장(埋葬)하는 장례(葬禮)가 되었건 간에 죽음과 직결되는 의례는 늘 엄숙하고 경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화가 가지는 주요 덕목으로 ‘변화’를 꼽듯,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변화되어 왔다. 우리 민족도 장례과정에서 일상적인 도덕률을 뒤집는 풍자적이고 희화적인 놀이를 즐기기도 하는데 ‘산다위’가 그것이다. 제주도 바로 위에 추자도(楸子島)라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섬에서 장례의식은 거의 여자들 몫이다. 남성들은 상여를 메고 운구만 담당한다. 부인들로 구성된 상포(喪布)계원들은 장지에 모여서 지관의 지휘 아래 산역(山役)을 한다. 이들이 세 갈래의 줄을 이루어 경쟁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노랫가락을 부르는 걸로 산다위는 시작된다. 시간이 흘러 하관(下棺)을 하고 제사에 이어 봉분(封墳)작업으로 넘어간다. 운상계의 남자들이 하나둘 돌아갈 준비를 하고, 상주들은 마지막 제사를 올리는 즈음, 갑자기 상포계 계장이 장지에 온 남성 가운데 한 사람(주로 망자의 사위)을 지목한다. 행동대원으로 약속된 건장한 여성 넷이서 달려들어 그 남성의 팔다리를 하나씩 낚아챈다. 그러면 나머지 여성들이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리고 몸부림치는 그 남자의 몸을 여기저기를 만진다.  예상(!)한 대로 먼저 남성의 성기를 만진 여성이 “이 물건 내꺼야!”하고 소리를 지르면, 어쩔 줄 모르는 남성은 살려 달라 애걸하고 계장은 놓아주면 얼마나 줄 것인가 흥정한다. 여자들로부터 풀려나 남자가 돈을 건네줌으로써 산다위는 끝이 난다. 예(禮)에 벗어난 산다위가 여태 존속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의례 절차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과정에서 인간적 본성을 억누르는 규범과 도덕률의 역기능을 떨쳐버리는 거다. 의례의 형식에 가려진 인간적 진실과 삶의 이치를 여러모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공감하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공감은 다분히 반(反)의례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장난을 가장하거나 우스갯소리인 척하는 반의례성은 죽음으로 빠져드는 슬픔과 엄숙의 의례를 삶의 신명으로 되돌린다. 의례의 ‘엄숙성’과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어깃장’은 죽음을 그저 죽음으로 몰지 않고 다시 삶으로의 균형감각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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