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마소서∼, 가지 마소서∼.”
간절한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왕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가?”
“후직 이찬의 무덤에서 나는 소리옵니다.”
옆에 신하가 아뢰었다.
김후직(金后稷)은 지증왕(신라22대)의 증손으로 왕손이다.
신라 16관등 가운데 2등급인 이찬(伊餐)으로서 진평왕 2년(580)에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다.
그 즈음 왕이 사냥하기를 무척 즐겨 국사를 소홀히 했다. 김후직은 진평왕에게 사냥을 자제하고 국사에 전념할 것을 수차례 간청했지만 진평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사냥 길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후직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또다시 간절하게 말리고 간하였지만 사냥은 계속되었다.
그 뒤 김후직이 병들어 죽을 때에 자기 세 아들을 불러놓고
“내가 신하로서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아 드리지 못하였는데, 만약 대왕이 방탕한 오락으로 사냥하기를 끊지 못한다면, 이로써 나라가 패망할 지도 모른다. 이 어찌 큰 걱정거리가 아닌가! 내 죽어서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드릴 작정이니, 내 주검[屍身]을 임금이 사냥 다니시는 길옆에 묻어다오.”
라고 유언, 그 아들들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왕이 사냥가는 길 가에 무덤을 쓴 사연을 자초지종 다 듣고 난 진평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 분이 죽어서도 충성으로 과인을 타이르니, 짐을 사랑함이 부모와 같도다. 만약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저승에서 어찌 대할 낮이 있겠는가!”
하고는 궁으로 되돌아가 몸과 마음을 근신하며, 이후로는 평생토록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김후직의 간묘는 황성공원(일명 고성숲, 논호림, 황성숲) 북쪽에 있으며 지금의 계림중학교 북쪽 담장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다. 밑 둘레 84m, 높이 5m인 이 묘는 경상북도 기념물 3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