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도 경주시민상 봉사부문 수상자
▶한마음의 집
행사장에서의 짧은 만남이 있은 후부터 앞으로 우리 모두의 삶을 어떻게 잘 이끌어나가야 할 것인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던 선생을 취재하기 위해 한마음의 집을 찾았을 때 선생은 출타 중이었다.
한마음의 집(경주시 외동읍 죽동리 571-1번지 전화 054)776-1053)은 경주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울산방향으로 가다가 입실 못 미쳐 연안네거리에서 우회전해 약1km정도 가면 동해남부선 철로를 지나 죽동이 나오는데 이 곳에 소재한다. 죽동마을은 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내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아늑한 시골마을이다. 이 마을의 나지막한 언덕에 가까운 산을 배경으로 텃밭을 끼고 앞에 제법 큰 내가 흐르는 곳에 40평의 2층 양옥집으로 된 한마음의 집이 작업장, 세면장의 단층 부속건물들을 거느린 채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일에만 열중하신 선생은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해서 허리디스크로 포항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선생의 면면을 만나 보기 위해 거처를 찾았다. 본관 2층 출입구 옆에 작은 칸이 선생의 방이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약 1평 남짓한 작은방은 호사스런 생활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반듯하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한 가지라도 더 갖기 위해서 헝클어져 가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옮겨다놓고 반성의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내친김에 선생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나는 한마음의 집을 돌아보기로 했다.
잘 가꾸어진 텃밭에는 고추, 양파, 감자 등 야채들이 심어져 있었고 버섯을 재배하는 버섯동이 2동, 시설 비닐하우스가 2동 있었다. 정원에는 갖가지 꽃이 심어져 있었고 정원의 조그만 연못가에는 원앙새 한 쌍이 서로 껴안듯이 앉아 있었다.
뒷산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축사에는 사슴과 염소, 닭, 오리들이 칸칸이 들어앉아 그들의 희망처럼 자라고 있었다.
작업장에는 장애인 일곱명이 전기소켓을 조립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전기선을 끼우고 드라이브로 나사를 조이는 제법 고난도의 작업이었지만 아주 능숙한 손놀림이 하루 이틀에 가능하게 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칫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을 수도 있는 이들에게 이런 생산적인 일이 있고 또 그것으로 자신의 통장을 살찌워 간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선생을 만나 그들에 관해 좀더 자세하게 듣고 난 뒤에서야 알았다.
포항성모병원으로 선생을 찾아간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선생은 경북 상주시 중동면 한 부잣집 5남매 중 넷째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 가난한 이웃사람들에 대한 아버지의 구재활동을 늘 지켜보았고 신앙했던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어려운 이웃사랑에 대한 실천을 가슴에 품었던 선생은 고아원을 운영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선생은 만 16세의 나이에 이미 교사가 되었다. 해방으로 일본인 여선생들이 다 돌아가고 여선생이 부족해 중학생 중에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1년 과정의 사범과를 수료하게 해 초등학교 교사로 채용하던 때였다.
이렇게 교직에 입문한 선생은 96년 경희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50년을 후진양성에 바쳤으며 그중 20여년을 특수학교에 몸담았다.
“대구 달성국민학교에 근무할 때 고아원을 할 마음으로 10여 군데의 고아원들을 돌아보았는데 시설이나 아이들의 참혹한 생활상을 보고 밥 먹여 키울 일만이 아니고 뭔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선생은 칠곡에 있던 한 장애인 시설과의 인연으로 장애인시설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꿈은 결국 홀트재단 산하의 완다학교 교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루어졌다.
오직 장애인을 위한 긴긴 사랑의 행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완다학교는 입양아들의 전지훈련장으로 홀트복지재단의 부속기구에 불과할 때였다. 따라서 교감이 사실상 교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선생은 비 정규과정의 장애인 특수학교였던 완다학교를 정규학교로 인가를 받는다. 그리고 학교 이름도 홀트학교라고 고쳤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학교시설로 만드는 일에 앞장선다. 홀트재단 산하기구들에 공문을 보내 약 1억원의 성금을 모아 학교를 새로 지었다. 이렇게 10년을 근무하면서 홀트학교를 완전한 장애인의 학교로 만들어놓았다.
“영부인 이순자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 테프를 끊었는데 대부분 외국 기관에서 참석한 외국인들이라 영부인이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겠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 불쌍한 아이들이 자연적 많을 수밖에. 홀트에 있을 때 입양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을 자주 갔는데 그 우는 아이들 두고 돌아오는 것이 그렇게 서러웠다.”
“빨리 잘 살아서 해외로 입양 보내지 말고 국내에서 입양해야 된다.”
그 무렵, 대구와 경북이 분리되면서 장애인학교를 경북에도 세워야했다. 문교부장관이 앞으로는 복지시설이 그 나라의 문화수준의 척도라며 경주에 그 학교를 짓도록 했다.
홀트학교가 마침 홍보영화인 대한뉴스에 나갔는데 이를 본 경북도교위에서 선생을 교장으로 특채했다. 선생의 경주와의 인연은 이로부터 시작됐다.
경희학교에 부임해 왔을 때에는 이미 학교건축이 50%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특수학교시설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던 때라 일반학교시설기준으로 학교를 짓고 있었다. 선생은 예산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는 교육감과 교장직을 걸고 담판, 공사를 전면 중단시키고 장애인학교로써는 거의 완벽한 시설의 오늘의 경희학교를 지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견학 오는 자랑스런 시설이 되었다.
“아시안게임 때는 외국인 2천명이 견학하러 왔었다.”
경희학교가 국위선양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경주교육청 산하 130명 교장 중에 제일먼저 운전면허를 취득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학교가 논 가운데 있었는데 견학 오는 사람들이 주로 밤늦게 찾아오는데 이들을 바래다 주기위해 목숨 걸고 운전을 배웠다.”
“문교부장관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교육감이 경희학교 교장이라고 소개하는 자리에서 부산의 모국장이 ‘강교장요 말도 마이소 저사람 밤에 우리집에 찾아와서 연설하고 간 사람인데 교육감님보다 내가 더 잘 압니더’하는 바람에 온통 들통이 났다.”고 회상했다
▶한마음의 집의 하루
한마음의 집은 경희학교에 근무할 때 퇴직금을 담보하고 외상으로 지었다.
“후원회장을 하던 이진구(현 경주시의장) 회장에게 ‘장애인을 위한 집을 짓고 싶은데 퇴직하고 돈 줄테니 집 지어줄 수 있나?’ 했더니 지어주었지, 돈은 2년후 퇴직하고 나서 원가밖에 못 줬다.”
정신지체장애인들의 꿈과 희망이 자라는 한마음의 집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서 약 4km정도를 걷는 운동으로 시작한다. 청소와 세수를 하고 7시에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등교하고 나머지는 짐승들의 먹이를 주고 또 밭에도 물을 준다. 그리고 작업에 들어간다. 저녁 6시부터 각종 동물들의 먹이를 주고 7시에 저녁을 먹는다. 9시까지 글을 아는 사람은 일기를 쓰고, 그 외는 자유시간을 갖고 9시면 취침에 들어 하루 일과가 마친다. 이들에게 힘에 벅찰 정도의 일상은 아니고 스스로 일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생활을 몸에 익혀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과정들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남의 도움 없이는 집안에서도 생활이 어려운 2급 수준의 정신지체장애인들로 평균 50~60정도의 지능지수를 가졌다. 색깔, 숫자, 컵 등 일상생활도구의 구분이 어렵고 자신의 나이조차 모르는 정도의 수준이다.
선생은 이러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들이 스스로 최소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애쓴다.
처음 오면 부지런하게 일하는 습관을 들이는 일에 교육을 집중한다. 그리고 아끼고 절약하는 검소함을 교육한다. 그리고 흙을 싫어하던 아이들이 흙을 좋아하고 거름도 막 만진다. “아주 못한 아이는 길에서, 그 다음은 밭둑에, 좀 똑똑한 아이는 밭에서 풀을 뽑는 작업을 한다. 처음엔 풀을 뽑으라면 곡식을 다 뽑아 버린다.”
“우리아이들은 부지런하고 일 욕심이 대단히 많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재미없으면 나가서 풀을 뽑고 일을 한다. 그게 몸이 익었다.”
이들이 작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금은 나누어 각자의 통장에 적립을 시켜준다. 적게는 2백만원에서 많게는 1천여만원을 적립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들이 필요한 것은 자기들의 통장에서 찾아서 사게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게 한다. “어떤 엄마는 아이가 준 돈을 못 쓰고 기념으로 늘 지갑에 갖고 다니기도 한다.”
또, 선생은 시간만 나면 이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경험을 쌓고 사회를 배우게 한다. 남산, 토함산, 강원도, 전라도, 울릉도, 제주도까지 다녀왔다. 한달에 3~4번은 여행을 간다고 했다. 외식도 자주 나간다.
“2년여의 노력 끝에 지금은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분별력이 생겼다.”
“나이는 포기했다. 1년내내 가르쳐 겨우 알만하면 또 한살 먹어 그때부터 또 새로 해야했다. 그러다 이젠 나이를 가르치는 것은 포기했다.”
그 따사로움을 알고 있는 그들, 엄한 생활 속에서도 아무도 집에 안 갈려고 한다는 것이다 매를 들고 “맞을래 안 맞고 너희 집에 갈래” 하면, “매 맞고 한마음의 집에 산다.”고 말하는 게 고맙다고 웃으시는 선생의 거름이 다 된 속이 홀연히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홀트에서 10년, 경희학교 13년, 한마음의 집 7년 등 30년을 아이들을 대해왔지만 아이들은 늘 새롭다.”
한 의로운 이의 고귀함으로, 사막에 수로를 끌어들여 숲을 만들 듯 제 몸도 못 가누던 사람들이 땅에 굳건하게 두발을 딛게 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하고 싶어 일하는 재미는 무엇에도 견주기 어렵다.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게 하고 더구나 집에서 늘 구박받고 혼이나 당하다가 ‘잘한다’ 칭찬해주고 돈도 되니까 일하는 것에 거부반응을 갖지 않을 뿐아니라 즐겁게 일한다.
건강만 좀 따라준다면 좀더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 몸이 말을 듣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셨다.
울산에서 과학대학 학생들이 대를 이어서 찾아오기도 하고, 울산 카프로회사 직원들 10여명이 매월 한번씩 찾아와 난로의 땔감을 장만해주고, 작년에는 언양에 있는 자수정동굴과 눈썰매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놀아주고,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봉사활동 한답시고 경력에 줄 하나 더 올리기 급급한 세상에 울산 카프로회사 직원들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찾아오는 분들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옳다고 생각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내는 확고한 신념, 일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당당함이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차분하게 지나온 과거 일들을 회고하는 선생의 자세에서 평생 교육자로 올곧게 살아온 선생의 인생을 엿볼 수 있었다.
“안 돼도 천번은 해야 된다. 오늘 안 되면 내일 또 하고, 그렇게 매일 최선을 다 할뿐”이라는 선생은 이러한 마음을 평생을 일관되게 가져왔었다.
“상패를 어디다 쓸까 생각중이다. 자식이 없으니 자손만대로 물려줄 수도 없고, 아주 귀한 것이니 죽을 때 누구한테 줄 건지? 상 받고 오는 날부터 생각중이다.”
한 생을 고스란히 바치고도 그 일에 후회 없이 담담할 수 있는 삶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고 보면 선생의 빛이 모든 이들의 가슴에 스며들기를 기원한다.
비가 오는 날은 비를 맞기도 하고 맑은 날은 햇살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순리의 삶을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선생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강정숙 선생]
1931년 1월 경북 상주시 중동면 출생
47. 9~74. 2 교사- 상주, 상신(이상 상주), 옥산, 종로, 달성, 칠성(이상 대구), 영덕 남호초등학교
74. 3~79. 10 교감- 청도 중남초등학교, 완다학교
79. 11~96. 2 교장- 홀트학교, 경희학교
96. 경희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
94. 한마음의 집 개소
2003. 경주시민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