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失里에서 최 해 춘 그 마을의 초입에는 늙은 당나무가 오가는 이 감시하며 서 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탯줄 끊던 가위 녹슨 마을에 사람보다 들고양이 숫자가 많아지고 되바라진 놈은 당나무 어깨죽지에 앉아 마을을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어느 여름 태풍이 당나무 팔 하나를 분질러 길목을 가로막아 버린 적 있었다 사람들이 부러진 팔 아래로 허리 구부리고 지나다닐 때 오래된 너털웃음이 마을을 떠돌고 있었다 정한수로 빌고 빌던 할머니 그 웃음소리에 밤잠 설쳤지만 부러진 팔이 베어져 나간 후에는 아무도 허리를 굽히고 가는 사람 없었다 흙담이 문둥병에 걸려 하나 둘 문드러지고 도회지로 떠났던 마을노인 꽃가마에 드러누워 돌아 올 때마다 당나무 가지 관절이 아파오고 욕창처럼 썩은 허리 밤낮없이 어둡기만 했다 기원하던 징소리 아직도 남아 바람에 씻겨 가는데 깊은 잠에 빠진 마을 깨어날 줄 모르고 들고양이만 어슬렁 마을길을 걸어다닌다 옛날은 가고 없고 지금만 남아서 다시 뒤돌아 보게 하는 삶인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느끼게 되는 걸까. 부모와 스승과 고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까이 다가와 비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심성인가 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그리 슬픈 건 아니나 가버린 시간과 남아있는 풍경에 대한 잔잔한 울림이 그것인데, 안정된 톤으로 시적 품격을 한층 높혀주고 있다. ‘시실리(時失里)’ 라는 어감 자체가 이 시의 분위기와 잘 접맥되어 시적 질감을 더해줌은 물론이다. 「징소리 아직도 남아/ 바람에 씻겨 가는데」 이런 대목에 이르면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향토시의 굳건함과 서정시의 전형을 심도 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부러진 팔이 / 베어져 나간 후에는 아무도 / 허리를 굽히고 가는 사람 없었다」에서 보여주는 것은, 세태의 변화를 당산나무 가지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데 이 또한 놓치기 쉬운 하나의 형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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