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문은 2003년도 경주시민상 수상자들의 삶과 생활을 조명해 보도함으로써 이분들의 훌륭하고 값진 삶을 널리 알려 시민들의 귀감이 되게 하고 따라서 경주지역사회가 더불어 잘사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2003년도 경주시민상 문화부문 수상자
[이종룡 선생]
2003년도 경주시민상 문화부문을 수상하신 이종룡선생을 동천동 우주로얄에 있는 자택으로 찾았을 때는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평생을 셋집을 전전하다 그것도 퇴직 한 후 어렵게 마련한 이 아파트가 처음 가져보는 자신의 집이다.
큰아들 가족과 함께 3대가 생활하는데 큰불편이 없을 정도로 꽤 넓은 집이었다.
집안은 아주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고 꼭 필요한 가구들 외에 겉치레한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더 넓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따뜻했고 그러면서도 차분하고 넉넉했다.
마치 한적한 산사를 찾았을 때의 편안함이 도심아파트인 이곳에도 있었다.
집안의 맑고 향기로운 공기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품과 검소하고 부지런한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선생의 방에는 오래된 나무책상과 낡은 의자가 정면에 놓여있었고 책장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향 선배로 이미 작고한 고청 윤경렬 선생의 그림 한점이 책장위에 걸려있었다. 그 외엔 최근 청력이 많이 떨어져 보청기를 해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마련한 자막서비스를 많이 해주는 평면 TV수상기가 한켠에 있을 뿐이었다.
귀가 좀 어두운 것 말고는 아직 정정한 모습이 도저히 팔순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새벽 5시면 황성공원을 한 바퀴 돌아와서 샤워를 하면서 오늘도 건강하구나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실제로 마주 앉아 지나간 세월들을 회상하는 3시간여 동안에도 자세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선생은 1924년 라듐성분의 함량이 많은 온천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직동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전까지 선생은 고향에서 교사로 일했다. 주을 중앙국민학교, 장진 상남중학교, 장진여자중학교 등에 근무했다.
일제치하에 태어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국 분단의 아픔을 맛보았고 그 후 들어선 김일성 공산체제는 일제보다 더 자유가 없고 사람이 서로 믿지 못하는 암울한 세상이었으며 그러한 사회체제에 반감을 가졌던 그는 거짓으로 미친 행동을 하며 정신병자로 진단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고 반공 무장게릴라부대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이념적 선택이 결국 모든 가족들을 등진 채 국군에 입대하여 월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삼촌들도 높은 위치에 있었고 소위 말해 가정성분이 좋았었다.”
“그러나 난 싫었다. 왜냐하면 일제 때보다 더 자유가 없었다.”
“공산주의는 참 무섭다. 여기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부자지간, 형제지간에도 서로 고발한다.”
함북일대 진격한 국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불과 3일만에 철군길에 올랐다. 국군을 따라나서야 했던 선생은 가족들과의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길을 나섰다.
성진에 도착한 선생은 23연대에 헌병보조로 입대했다. 그리고 후퇴하는 마지막 배를 타고 3일간을 굶으면서 이동했는데 도착해보니 구룡포였다.
포항에서 신체검사하고 정식으로 입대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경주로 이동해 3일간 머물렀다. 그때 경주역전에 계림초등학교가 있었고 지금의 경주우체국 자리가 광장이었다. 이곳에서 분대단위로 민박을 했는데 그때, 당시 경주중학교 교감으로 있던 류시근 선생을 만난다. 선생이 경주에 정착하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고 훗날 양부와 양자의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박하려고 찾아간 집이 류시근 선생님 댁이었다.”
“나도 선생을 하다 왔고 왜정시대에 국민학교 선생도 했으니까 서로 대화가 되었다.“
당시 류선생도 피난 온 처지라 넉넉하지 않았지만 정성을 다해 일행을 대해주었다.
그리고 사흘 뒤 23연대는 홍천으로 이동했고 횡성, 영월, 제천 등 강원도 일대에서 전투에 참가했고 여기서 선생은 병을 얻어 의식을 잃고 후송 되었는데 보름만에 깨어보니 경주의 18육군병원이었다. 당시 경주에는 경고, 공고, 계림(역전) 황남, 월성초등학교 등에 육군병원을 차려놓고 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2달간의 치료 끝에 완치되었지만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퇴원과 동시에 군인신분을 잃었다. 당시가 전시라 군무행정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선생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래서 일전에 경주에서 민박하면서 알게 된 류시근 선생댁을 다시 찾았다.
“사모님이 워낙 인정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식량이 부족해 정구지(부추) 넣고 죽을 끓여 먹는데 자기 식구들끼리도 부족한 상황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류 선생은 취직 시켜준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에게 교사자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감포수산기술학교에 취업을 했다. 여기서 선생은 평생의 반려자인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선생은 52년 10월에 결혼하고 53년 5월 5일 경주중학교에 취직하게 되었다.
“류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선물을 싸서 찾아가면 오히려 호통을 치고 무슨 돈이 있느냐고 꾸지람을 하신다. 너무 고마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완전히 양아들이 되었다.”
선생에게 있어 류선생은 은인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의지하고 용기와 살길을 열어준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해 늘 감사하고 지금까지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 선생은 한림야간학교에서의 봉사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이분들에게 내가 입은 은혜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나보다 다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은혜를 입고만 살았다.”
“도움을 받기만 했던 나는 남을 도울 길이 없겠는가? 생각하다 한림야간학교를 나가게 되었다.”
73년에 개교한 한림야간학교는 학생들을 졸업을 시키려니 교장이 필요했다.
“김윤근, 김태영 두 사람이 찾아와 교장을 맡아달라고 해서 ‘자네들이 좋은 일 한다고 해서 단지 도울 뿐이지 나서는 건 싫다’고 거절했으나 3번이나 찾아와 ‘이름만 빌려 달라’고 해 거절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귀가 멀어져 수업이 불가능했던 98년까지 23년간 한림야간학교 교장을 맡았다.
한림야간학교는 대단히 어려웠다. 학생모집, 교사, 장소, 돈 등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경주중.고 영어, 수학 선생치고 한림학교와 관계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는 현직교사들이 과외를 하던 때라 특히 영어, 수학 교사들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부탁하면 거절 못해 나오지만 한두 달도 제대로 못하고 그만두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부탁하다 보니 모든 선생들이 한림야간학교를 거쳐 가는 꼴이 되었다.
“전두환 덕을 본 거야. 과외금지로 선생들이 과외를 못하니 선생 구하기가 한결 쉬워졌거든”
시립도서관(지금은 별관), 다음은 경주상고에서 수업을 했는데 84년도에 경주상고가 종합고등학교로 바꾸어 문과반을 만들어 본교학생들이 야간자습을 해야 하니까 비켜달라고 했다. 학생모집도 어려웠고 장소까지 문제가 되어 한림학교의 폐교를 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김윤근 선생과 의논하니(폐교문제) 김선생도 동의했다.”
“권윤식 선생이 교감이라 ‘지금 있는 학생들만 공부시키고 이제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의논하니 권선생이 ‘고청선생은 박물관학교를 3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4-5명의 사람이 나와도 해 왔다는데 한림학교는 그 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해서 폐교위기를 넘겼다.”
그때 마침 경주청년회의소 이달회장이 청년회의소 회관을 지어면서 교실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회관 준공 이후 공사비가 부족하다며 교실을 만드는 비용은 한림학교가 자부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호소문을 써서 김윤근, 권윤식선생을 차례로 데리고 다니며 모금을 하기 시작해 3백만원을 모금하고 선생들이 일일찻집을 해서 1백만원을 만들고 해서 4백만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영경비를 경주중.고등학교 선생들이 월급에서 100원씩, 다음은 500원씩, 나중엔 1000원씩을 내 주어 어렵게 운영해 오던 형편이었는데 모금이 계기가 되어 시민들에게 많이 홍보가 되어 이후부터는 각종 사회단체와 독지가들의 성금이 줄을 이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벗을 수 있었다.
“한림학교는 시민들이 도와주어서 되었고 전국 어디에도 예가 없을 것이다. 경주만의 독특한 문화와 자긍심이 아닐까 싶다.”
한편 한림야간학교(교장 이기락)는 올해 개교 30주년을 맞아 10월 25일부터 26일까지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중학교 323명, 고등학교 180명 등 총 50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 학교는 현재 33분의 선생님과 60여명의 재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기에 함북 주을에서 때어난 선생은 조국광복의 기쁨, 주변열강들에 의해 38선에 그어진 분단조국의 아픔,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휴전선으로 불리는 우리민족의 시퍼런 멍애 등 해방전후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 그 역사현장의 가장자리에서 그 아픔과 슬픔, 고통과 애환을 죄다 겪어야 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을 북에 두고 홀홀단신 월남한 이산가족으로 평생을 부모형제에 대한 죄스러움과 그리움, 회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했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모든 아픔을 딛고 평생을 교육계에 투신해오면서 투철한 사명감과 뚜렷한 소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성실과 근면, 철저한 자기관리와 검소함으로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참스승의 상을 구현해 보였다.
특히 한림야간학교에 23년간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의 꿈을 접어야했던 후학들에게 등불을 밝혀 주셨고 야학 30년이라는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의 전통있는 명문 야간학교의 기틀을 세우셨다.
누가 이 사회에서 존경할만한 참스승이 없다고 했는가? 누가 또 이 지역에 어른이 없다고 했던가? 이종룡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에 존경받는 참스승, 참 어른의 본보기를 내 보이신 삶을 우리들에게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평생을 봉사하는 삶을 살아온 선생을 50여년 동안 묵묵히 내조해온 최복남(73)여사와의 사이에 4남매를 두고 있다. 장녀 경희(50 아동교육학박사)씨는 성심대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맏사위는 고려대 류문일 교수다. 장남 경수(49 자영업)씨는 자택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고, 차남 경태(46 대우전자)씨는 구미, 막내 경미(43 피아노학원)씨는 황성동에 살고 있다. 둘째 사위가 이찬우(46 대보건설 대표)씨 이다.
“이 사람이 참 고맙다. 신혼초에 동향 선배 가족들을 9년간 뒷바라지하면서도 불평한마디 없었다. 또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다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니 이제 더 바랄게 없다.”
“다만 평생을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죄 지은 마음으로 살아왔다”
“혼자 월남한 게 후회된다.”
며 눈시울을 적시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