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의 造形物을 보며《7》
-內容美를 중점으로(5) - 5, 17
向石 李 東 浩 (조각가)
한국미술가협회 경주지부장 역임
신라미술대전, 도전심사위원
제13회 신라문화상 예술부문수상
경주고교재직(72∼현)
지난 호에 기독교우상숭배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하였다.
직립 보행하게된 인류는 생존본능으로 하여금 손(手)으로 도구를 발명, 사용하게 됨으로서 놀라운 문명을 이뤘고 생태계도 큰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문명인간이 동물한계를 벗어낫다고는 하지만 인간능력의 한계성에 봉착했을 것이다.
여름날 뙤약볕의 하늘에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동반한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찢고 대지를 내려치는 현상에 누구라도 두려움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이 천재지변을 일으킬 것 같은 천둥벼락이 전기충전의 물리작용이라는 과학지식을 갖고있는 현대인도 두려울 찐데 하물며 그러한 지식도 없는 원시고대인의 정신상태는 어떠하였겠는가.“저 벼락 맞아 죽을 놈”은 인간이 아닌 벼락을 일으키는 어떤 전능한 존재 즉 신(神)이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되질 놈을 응징하길 바라는 심리의 표현이다. 벼락은 바로 신이고 숭배대상으로서 인간이 호소의지하고 복종숭배 하려는 원시적인 신앙대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숭배, 영혼불멸, 무당, 동식물숭배, 금기형벌, 주술 등의 형태가 생성되었다
씨족의 무리가 자리한 지리조건, 풍토, 기후 등의 지역특성에 적응한 인간과 동식물의 군(群)이 그곳에 분포하였다. 이에 따라 생물은 집단화되었고, 인간은 부족을 넘어선 민족을 이뤘다. 그리고 그 민족은 시대의 생활양식을 형성하면서 그들만의 민속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는 국가의 대소문제를 종교와의 연관에서 그 해법을 모색하였던 인간능력의 모자람을 절감한 시기로 볼 수 있다.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서 기후가 온화하고, 계절기온의 편차가 적고 사방에는 강물이 풍부해서 살기 좋은 고장이 경주다. 따라서 인구가 많을 밖에 없었기에 우리나라의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부족국가를 어뤘고, 다사다난한 집단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삶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생(生)의 미련과 사(死)의 공포와 인(仁)의 희망을 기원하는 민속신앙 발생의 근원지가 되었다. 경주의 남산이나 남천에는 그러한 민속신앙의 흔적은 물론이고, 불교나 유교도 아니고 기독교는 더욱 아닌 민속신앙이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다. 필자는 경주출신 김동리(金동里)와 박목월(朴木月)의 문학세계가 이를 주제로 출발했다고 본다.
먼 옛날 일찍이 국가를 이룩한 중동지역은 수많은 민속신앙의 자생지였고, 이들 민속신앙의 체계화는 종교가 되었으며, 이의 대다수가 발흥된 곳이다. 그런데 중동의 종족 대부분이 함(Ham)族인데 반하여 유대종족은 유일하게 셈(Sem)族이다. 그러므로 함족의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접한 유대셈족은 항시 국방의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존망의 기로선상에서 유대민족 여러 부족들의 결합은 필연적이었고, 그 응집력을 절대적인 존재성에서 구하여야만 했다. 그들의 생사문제를 호소하며 도움을 기원하려는 전능한 유일성 존재를「야훼」라고 정하고, 야훼에 의하여 우리 유대민족은 선민(選民)이 되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신앙심으로 무장하였을 것이다.
인구증가에 따라 수렵채취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되었으나 동식물은 인간의 생활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산업의 근간은 농경과 축산이었고 이에 필요한 모든 수단방법이 모색되었다. 관개수리, 기후, 달력 등은 물론이고, 가뭄홍수의 재해와 전쟁을 피하고, 풍작에는 전능한 신의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따라서 농경과 축산국가 함족의 여러 나라는 다신교의 체재가 되었고 수많은 신상조형물을 조성하였다.
그 신상들은 풍년을 가져다 주는 신의 상이면서 또한 신과 국민의 중간자인 왕권도 상징하는 상(像)으로서, 일상적인 사물은 아니고 상상을 구사한 가시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구현된 신상을 숭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수리날개와 사자몸체에 인간두상을 접합한 신상의 모습, 즉 두 세 가지 동물의 특정한 부분들을 접합한 동물모습의 함족신상을 유대입장에서 보면 신으로 상상하고 각인된 창조주 절대존재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동식물을 접합한 신상조형물, 다시 말하면 함족 자신들이 만든 물질의 우상((偶像)을 그들 자신이 숭배하는 그 어리석음, 그리고 적어도 인간이나 동물과는 그 모습이 달라야만 하는, 그래서 유일신의 모습에 관한 유대민족의 관념은 우매할 뿐인 우상적(愚像的) 조형물의 숭배를 당연히 금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의 민족정신은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자기들만의 카테고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배타적으로서는 유대민족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은 자(者) 예수는 이러한 유대민족의 배타성 범주에「사랑」으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사랑은 너와 나를 포함하는 상호보완적인 작용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배타성은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인류전쟁사의 대부분이 종교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이라크전쟁도 그 맥락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카톨릭과 동구의 그리스정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모 3위의 조형물을 조성한다.
고대 조형물은 종교의 부산물이고, 필자는 종교인도 아니며, 또한 종교적인 문제가 본문의 주제가 아니므로 오해 없길 바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