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의 造形物을 보며《3》
- 內容美를 중점으로 (1) - 4, 07
向石 李 東 浩 (조각가)
신라미술대전, 도전 심사위원
신라문화상 예술부문 수상
경주고교 재직
60년대 후반 통칭 대구로터리의 원형분수 내에 화랑원화(花郞源花)상을 건립하였으나, 점차로 급증하는 교통량 해소, 그리고 시멘트 재질과 그 규모의 문제로 30년 후에 철거하여서 현 경주교차로가 되었다 .
지구형태 위에 입상(立像)한 화랑원화는 여기가 신라고도 경주이고, 우리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원동력! 그 뜻을 이어받아 국가에 공헌하자는 느낌의 직설적이며 일차적인 시각은 신라시대와 경주지역의 한계성에 국한되는 협의(俠義)의 내용미(內容美)로 볼 수 있다
「조각이 없는 민족은 철학이 없다」라는 말은 바로 내용미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마 유목민이기에 조형물이 없을 수밖에 없는 몽골제국의 흥망성쇠에서, 일본 나라市 동대寺의 거대한 청동좌불상에서 왜소의 열등의식을, 미국의 현대조형물에서 실용주의와 자유여신상에서 희망과 자유의 갈구를, 레닌그라드의 여신상에서 영웅성의 패권주의를, 스웨덴 빙겔만 조각공원에서 생로병사의 인간고뇌를 보게 된다,
김일성(金日成)동상에서 획일성 교조주의를, 방콕의 수많은 사원에서 윤회의 체념을, 아잔타 석굴에서 계급에 대한 괴로운 몸부림을, 피라믿에서 내세에 따른 권위의 잔혹성을, 만리장성에서 전제의 중화사상을 보게 된다.
조형물이 우리에게 보이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효과적으로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형식은 그 조형물의 가치와 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본원소가 된다, 우리가 거래의 목적을 성취하려면 어떤 대화내용을 어떻게 구사하여야 할까?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속신앙의 발상지인 경주에 산재한 신화전설의 상징적 내용을 현대적 형식기교로 조형한다면 그것이 경주의 원초적인 정체성(正體性)이 아닐까? 물론 대부분의 조형물이 김유신(金庾信)장군동상과 같이 특정한 목적으로 조성된다. 그러나 장군에 대한 이미지가 백제나 고구려지역에서는 신라지역의 관점과 다르다면 장군의 메시지는 한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서울 세종로의 이순신(李舜臣)장군동상을 보자, 세계 해전 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그러한 탁월한 전략을 구사할 됨됨이와 백의종군한 인격이 바탕 되었기에 가능하다는 관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이 동상의 장군이 지휘도를 왼손에 잡았는데 이 자세는 항장(降將)을 의미하는 동세이므로 철거론이 대두된 적이 있었다.
필자가 이 동상 제작팀의 일원이었기에 조수들끼리 눈짐작한 제작비 15억 정도를 현재 물가상승 비율로는 100억 이상의 소요금액이 된다.
그러나 장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철거론이 시사하는 바는 조형물 내용의 보편적인 일반성을 의미하는 한 관점을 뜻한다고 보겠다
이처럼 조형물의 내용미는 소설(小說)의 광범위한 내용을 시적(詩的)으로 함축했지만 그 다양성이 암시되어야 하는 내용상의 다중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향토적인 것이 한국적이며 세계적이라는 의미는 향토색 짙은 경주의 정체내용이 신라시대성과 경주지역성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한국적이며 세계적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 광범위한 내용을 연구, 함축한 조형작가의 전문성과 직감과 보편의 일반성이 접합되어서 넓은 공감대가 형성하여야 되기 때문이다.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신라의 정체내용을, 미국의 자유 여신상에서 희망과 자유의 불길내용을 봐왔다.
예술가는 그 장르의 소질을 내보이는 단순한 재주꾼만은 아니다.
무한히 자비로우면서도 엄격한 양극(兩極)간의 폭이 표출된 석굴암 본존불상을 조형한 그 조각가는 바로 본존불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본존불상은 그 조각가의 생활체험 내용이 반영된 조형철학의 상(像)이기 때문이다.
신인작가를 등용하는 국전과 도전, 그리고 신라미술대전 등의 각종 공모전에서 심사 후 잡음이 파생되기도 한다.
인맥 또는 사제관계이니, 심사위원이 세(勢)를 확장하기 위한 포석이니, 선정에 대한 대가가 막후에서 작용했다는 등 온갖 쑥덕공론이 쉽게 가라앉질 안는다. 결국에는 그런 심사위원은 문제에서 빠지고 그들을 위촉한 집행부 탓으로 귀착되고 만다..
그런데 이 문제가 인맥이던 사제지간이던 간에 미의 동질성에서 야기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하나의 미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마다 체험내용이 달라서 취향의 개별성으로 하여금 다양한 미를 형성하고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심사위원의 시각에는 자기와 동질성의 아류가 좋게 보이기 마련이어서 이를 넘어선 미관(美觀)의 폭(幅)과 격(格)으로 심사를 하지 않거나 못한 탓이기 때문이다. .
협의적이고 일차적인 작가시각, 빠듯한 제작기간과 대가, 그리고 관계당국과 일반성의 단기적인 안목이 연출하는 조형물은 이제 경주에서도 지양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慶州의 造形物을 보며《4》
-內容美를 중점으로(2) - 4, 14
向石 李 東 浩 (조각가)
경주 덕동댐 준공비 -78, 농업진흥공사-
독립군총사령 朴商鎭 義士동상 -82, 울산시-
탈고되지 않을 군마상 -91, 천마공원 (주)-
새마을금고 신축연수원조형물 -99, 천안시-)
예술은 모방감각에서 출발하고, 모방의 궁극목표는 그 사물에 대한“바로 그것과 흡사해”라는 묘사의 탄성관계이다.
존재하는 유무형(有無形)의 사물에는 생물과 무생물이 있다. 그 구별은 유형의「생물이 살아 있고, 무생물은 죽어 있다」는 상태이기 보다 「스스로 움직인다, 못 움직인다」의 현상이다, 무형의 정신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의 현상은 정신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무생물이라고 보는 지구가 죽어 못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자체가 움직이는 사물이어서 「살아 움직이는 지구」에 생물과 무생물이 적절히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움직인다」라는 생동현상은 ㉠ 지점에서 ㉡ 지점으로 위치를 변경하는 과정이며, 그 목표는 보다 발전적으로 성장하여 변모되기 위함이다.
조물주는 아담과 이브를 흙으로 사람형상을 만들고 생기를 주니 이 인간이 100m를 10초에 스스로 달리는 생동(生動)의 생물을 창조하였고, 조각가 로댕은 아담 이브가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생동의 감(感)을 무생물질 청동으로 창작하였다.. 이 점이 현재로는 인간의 한계성이다.
또한 솔거(率去)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노송(老松)을 황룡사 금당 벽면에 그렸더니 생물노송으로 착각한 참새가 충돌하였다
불후의 조각과 그림의 미술은 물론 건축을 남겼고 또한 시인 미켈란젤로는「돌 속에 생명이 꿈틀거린다 」라고 했다. 이 역시 조각의 본질인 생동감을 명료하게 나타낸 말이다. .
따라서 조각에서 바로 그것이야! 라는 감탄은「생동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이미지를 표출함에 있어서, 석굴암 불상의 생동감을 정중동(靜中動)으로 조형하였으므로 돌(石)이지만 이 살아 앉은 부처님에게 우리는 기원과 예배를 하게된다,
민속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밀랍 마네킹은 처음에는 흡사「산 사람」같이 보이지만 점차 죽어 움직이지 못하는「사체(死體)의 섬뜩한 느낌」으로 변한다. 그러하므로 마네킹 같은 느낌을 주는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불상의 화강석 덩어리가 과연 우리 중생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 두 불상과 중국 운강석불의 조형적 비교는 차후에 살피고자 한다
경주1C에서 시내진입 서라벌도로를 국제관광도시의 대로로 86년 확장 할 당시, 숙원사업을 뒤로한 이 사업순위에 시민의 반대와 비난도 무릅쓰고 추진, 개통되었고 이제는 그 타당성을 수긍한다.
그런데 대로에 있는 나정교(蘿井橋) 난간양편의 양 종점에 위치하는 조형물에서 그 좌대 만이 설치되었던 까닭은 예산부족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본 교량의 난간디자인과 조형물구상에 관계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시민으로서, 또 관계한 입장에서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국내외의 객(客)에게 각인될 경주시 가시인상의 첫 관문인 이 교량에 바람직한 조형물이 빨리 조성되어야 할 텐데.. 그러나 조성하지 않았다.
그 후 10여 년 지난 9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숫(♂) 석사자 4구가 동일한 모습으로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석사자들은 사자의 것 모습만 흉내냈을 뿐, 경주를 수호하려는 당당한 위용과 생동감이 없음은 고사하고 그 빈약한 양감과 규모는 주위의 광활한 공간에 짓눌려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설치되어 있음에 놀랐다. 그러나 나정교는 인도(人道)로는 이용도가 낮아서 주행 중에는 이 사자상의 존재나 무가치성이 눈에 잘 띠지 않는다
이러함에 대한 관심이 식기도 전에 한술 더 떠서 이번에는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인도로 이용하는 서천교(西川橋)에도 나정교 것과 동형의 4구 석사자가 비 맞은 것 같은 초라한 모습으로 입이나 벌리고 앉아 있질 않는가.
물론 시정(市)이나 시민(市民)은 조형에 전문일 수는 없다. 그러하기에 시정은 안좌하고 시민은 나의 바쁜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잣대로 하여금 함구, 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느끼는 감(感)은 전문가나 비전문가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자조형물이 시민에게 등한시나 되고 전문가에게는 무시당하는 대상이라면 설치할 필요가 없고, 필요하다면 필요 충분조건의 조형물을 설치함이 타당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조형물은 시민의식을 반영하는 체(體)이기 때문이다 경주는 그러한 사자상과 같이 초라하고 위용도 없는 시정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다.
바람직한 교량조형물이 어찌 사자상 뿐이겠는가? 확장할 당시 필자는 사자상을 포함하여 구상한 4종류의 안을 제출했었다. 그러나 구태여 수호석사자로 한다면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순회한「한국미술 5000년 전」에 전시되었던 괘릉동 원성왕릉(元聖王陵)의 수호석사자가 버젓이 경주에 있음을 시민 대부분도 아마 모를 것이다 그래서 기능석공들의 대량제품인 이 보잘 것 없지만 흉내라도 낸 석사자 이나마 외지(外地)에서 구입한 것을 이해한다
통일신라의 문화전성 말기에 축조된 38대 원성왕릉에는 石사자를 포함하여 문무인(文武人)상들이 있다 그 조형수준은 가히 석굴암 불상조각들과 그 맥이 이어져서,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필자는 이론가가 아니고 제작하는 조각가의 입장에서 이를 고찰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