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난 곳은 남산 서쪽 자락 삼릉 앞 작은 마을이다. 지금은 마을 이름인 배동보다 삼릉이 더 많이 알려져 배동, 혹은 옛 이름인 배리(拜里)보다 삼릉이라고 해야 더 많은 사람이 알아듣는다.
지금 삼릉 계곡은 남산을 찾는 답사객과 등산객의 발길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지만, 그 땐 달랐다. 봄과 가을, 소풍온 학생들이나 계곡을 누비거나, 일요일이면 무슨무슨 소리사에서 빌려온 마이크로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놀음 패들이 찾았을 뿐, 문화유산을 찾는 이나 등산객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당시 삼릉 숲의 주인은 산 언저리에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초봄이면 어머님이 향기로운 산나물을 뜯어 가득이고 내려오던 길이 삼릉 길이었고, 참꽃을 따먹다 잉크먹은 입, 송기 먹다 껄껄해진 입에 해맑은 웃음을 머금은 아이들이 하루 종일을 놀던 곳이 삼릉 숲이었다. 돌더미 어디를 들쳐도 뒷걸음질치는 가재가 지천으로 있던 개울에서 건진 가재를 낀데기에 꿰어 내려오던 길이기도 했다. 여름이면 농사일에 지친 어른들이 바람을 쐬고, 그 어른들로부터 "가뭄든다"는 흰소리를 들으며 짤개를 받던 아이들의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곳도 삼릉 숲이었다. 겨울이면 아버님, 형님의 나무 지게 뒤를 따라 나무 동매를 매고 다리를 달달 떨며 바위를 넘어오던 기억도 새롭다. 능참봉댁에서 애벌 깔비를 끈 다음부터는 바람 불 때마다 떨어지는 깔비를 하나라도 더 끌기 위해 소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닌 기억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삼릉 숲에 얽힌 기억이 어디 이 뿐일까. 어느 계절의 유년 시절을 더듬더라도 삼릉 숲은 어김없이 기억의 저편에 또렷이 남아있다.
당시 삼릉 숲에서 다른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소나무만 빽빽했다. 지금이야 삼릉 묘비쪽에서도 한길이 훤히 내려다 보이지만, 당시엔 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고, 밤에도 나무 사이로 간간히 차 불빛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던 삼릉 숲이 솔잎혹파리의 무차별 포격을 맞은 후 삼릉 숲은 변했다. 나무 밑둥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수관 주사를 놓았고, 초여름 학생들을 동원해 유충을 잡았고, 장독 닫으라는 방송이 끝나자말자 굉음을 울리며 날아온 헬리콥터가 새하얗게 농약을 뿌려댔지만 솔잎혹파리의 공세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포탄 맞은 전장터처럼, 그 시원했던 삼릉 숲이 그 때부터 제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일까. 키재기하던 옆 나무가 쓰러지자, 수십년 수백년 모진 비바람에도 꿋꿋하고 굳건하게 버티어 서왔던 나무들이 웬만한 바람에도 쉽게 무너졌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사라진 곳 여기저기에 잣나무가 자라고 있다. 자생적인 것은 아니고 대체 수종으로 심은 모양이다. 무슨 까닥에 잣나무를 심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잣나무가 제법 컸다.
뻥뚫린 공간을 잣나무로 채운 것까지 시비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왜 잣나무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다. 유년이 기억이 너무 강한 탓일까. 잣나무는 어딘지 모르게 삼릉 숲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소나무 어원은 수리나무다. 수리나무가 솔나무로, 솔나무가 소나무로 변했다. 수리란 무엇인가. 으뜸이 아닌가. 우리 민족은 소나무를 모든 나무 가운데 으뜸으로 쳤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면 옛 어른들이 왕릉 주변에 소나무를 심은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삼릉에 가면, 솔잎혹파리 침범 이후 숲 보존을 위해 종합적인 대책을 세웠더라면, 변화된 환경을 숲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세심한 배려를 했더라면, 숲이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본다. 잣나무를 꼭 고집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따져보고, 구역별 휴식년제를 도입하는 등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삼릉 숲 보존책을 세울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