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가정에서 만나는 가족은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는 달콤함이 있다. 여러 해 전에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나와 인연을 맺은 마르고 키 작은 학생이 있었다. 성격 탓으로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이후에 부모님은 각각 재혼을 하였다. 부모는 서로가 생활상의 이유를 들어 학생을 데리고 살지 못한다며 학생을 부모 없는 경주에서 혼자 생활하는 처지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담임을 맡았을 때는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조차도 보탬을 받지 못하는 딱한 처지였다. 아버지가 얻어준 성건동 월세방도 첫 달 이외에는 방세가 밀려 방세도 필요 없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주인집 아주머니와 마주하였다. 도무지 부모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선생님이 좀 해결 해 달라는 것이다. 전혀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학생을 달래어 부모님과 친척들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일일이 전화를 하였다. 한결같은 대답이 “가슴 아프지만 나는 모르겠으니 저쪽에 이야기하세요.” 본인들도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니 자꾸 전화하지 말라며 전화번호도 바꿔버렸다. 답답하고 가슴이 아팠지만 쉽게 친구도 사귀지 못하는 학생을 위하여 반 학생들을 데리고 함께 순대집과 자장면집을 돌았다. 허기진 배는 라면으로 채울 수 있지만 가족사랑으로 허기진 가슴은 채워 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이후에 학생은 졸업을 하고 직장에 잘 다니고 있다고 전화가 왔었다. 오늘 저녁, 동네에 있는 문방구 앞에서 차가운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까칠한 얼굴로 작은 게임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제자 생각으로 가슴이 아프다. 요즘 같은 방학동안 컴퓨터나 게임기가 친구의 전부인 학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보편화되고 가정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 가정문화는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저녁시간에 부모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학생들에게는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반발심만 생긴다. 학생이 공부 잘 하기를 바란다면 학교와 학원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같이 앉아서 책이나 신문을 보면서 시사적인 내용으로 토론도하고 서로의 하루일과를 들어보고 대화의 창을 열어야 한다. 간혹 학부형과 면담하면 “애가 도무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청소년기에는 부모 자식간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부모님은 대화로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대화의 내용을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갑자기 부모님이 좋아하는 낚시터에서, 등산길에서 대화의 창이 열리길 바라서는 안되겠다. 이미 대화소통이 잘 안 된다면 사소한 일상과, 학생이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현장에서 대화는 시작 된 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어릴 적, 가족들이 이불 한 채에 다리를 모아 넣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구마 굽고 밤 구워 먹으며 서로의 일상사를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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