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급속히 도시화되면서,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농촌지역을 보며 큰 감흥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 경주에는 농촌사회의 잔존 외에도 유물의 보존을 위한 목적으로 전원지대가 더욱 너르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경주의 자연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만으로 끝낼 수 없다. 삶에는 낙관과 희망의 면이 있는 동시에 절망과 고통의 현장이 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농촌이나 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목가적인 동경을 하는 것은 농민을 무거운 무게로 짓누르는 고통의 현상이나 그 원인을 때때로 가려버린다. 직접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농민의 어려움을 실감하기 힘들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직접 농사일을 해보기도 하며 그 어려움을 절감했다. 흔히 사람들은 농사가 그냥 땅에 씨를 뿌리면 나중에 수확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의 신체는 아주 약하다. 낫질 한번 잘못 하다가는 낫의 날에 연약한 피부나 뼈는 여지없이 상처를 입는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를 다수 사용한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생산성이 낮아 채산이 맞지 않으니, 그 사람이 짓는 농사란 그냥 배부른 자의 유희일 뿐이다. 그런데 그 기계에 걸핏하면 사람이 다친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농약의 문제는 어떠한가? 투하비용에 비하여 산출작물의 양이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그 작물은 상품으로 유통될 수 있다. 그러니 농민들은 손쉽게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 농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농촌에서 제초제를 쓰지 않고 일일이 김을 맬 수는 없다. 김을 매는 인건비를 다 넣자면 차라리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어딜 가도 제초제를 쓰기 때문에 논둑이나 밭둑은 말갛다. 보기에야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이는 죽음의 평화에 불과하다. 잡초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다른 모든 것도 죽여 버린다. 제초제를 뿌리고 손에 낀 장갑을 세숫대야에 씻었는데, 그 대야의 물을 뒤집어쓰면 바로 몸에 침투하여 폐를 녹여버린다. 얼마 전 어떤 사람-대단히 전문적인 농사꾼이었다-이 그냥 무심코 대야의 물이 엎질러지며 물이 몸에 튀어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사람은 몇 달간 병원신세를 진 끝에 겨우 회생하였다. 그만큼 농약은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이런 농약을 수시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농사꾼의 몸이 과연 그대로 성할 수 있겠는가? 농민들은 이렇게 온갖 위험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밥 먹고 사는 것이 우리 농사꾼들이 처한 상황이다. 이들에겐 각박한 현실을 잊을만한 미래란 없다. 우리는 이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이 아닐까?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다 하니까, 서울 강남에는 구청이 걷는 지방세가 넘쳐 그 사용처가 모자라 관할 구역 내 초등학교에 5억원을 주어 전자도서관을 마련해주었다고 하였다. 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부러운 심정을 갖기에 앞서서 농촌 초등학교의 한적하고 쓸쓸한 모습과 거기에 다니는 애처로운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의료시설이나 사회간접자본의 투하 혜택은 거의 도회지에 집중된다. 이런 점에서 과연 국가는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국가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최고법인 헌법의 정신이다. 그럼에도 한 곳에서는 돈이 철철 넘쳐 쓸 곳을 잘 찾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는 쓸 돈이 전혀 없게 방치하여 두 곳에 사는 국민들이 다 같은 국민임에도 현저하게 불공평한 취급을 받고 있다. 이를 그대로 둔다면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지방세의 징수규모를 주민 일인당 얼마씩으로 정해 여기에다 해당지역 주민수를 곱한 기준금액을 산출하다. 어느 지역에서 징수금액이 기준금액을 초과하면, 그 초과금액의 상당부분(예컨대 30%라든지 하는 식으로)은 한 곳에 모아 이를 기준금액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지역 특히 낙후된 농어촌지역에 분배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획기적인 대책이라도 강구하지 않으면 농어촌지역은 더욱 더욱 낙후되어간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우리 농민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에 대하여 이를 직시하는 시책이 행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 헌법이 갖는 이념, 정신을 실현하는 국가공동체의 당연한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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