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와 자비의 사회화
환대를 받아 몸둘바를 모르겠다.
경주는 모든꿈이 형성된 고향이다.
내남에서 태어나 중학교 1학년때부터 황남동에서 자취를 했고, 고등학교 1학년때 분황사에서 스승 도문스님을 만난뒤 분황사에서 함께 살았다.
그뒤 학창시절 불교활동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황룡사 복원의 꿈을 키웠다. 그꿈을 이루고 싶고 죽기전에 꼭 복원하고 싶다.(웃음)
그저께 귀국하기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돕기 활동을 했다. 1800여년전 대승불교의 발원지를 둘러보면서 생각도 못했던 거대한 불탑을 많이 봤다.
이런 탑들을 어떻게 보호할것인가 생각하면서 30년전 경주 불교학생회 시절 유적보존활동을 떠올렸다.
당시 남산동 쪽에 밭에 방치된 석탑 보존을 위해 3만여원을 모아 밭을 매입해 달라며 경주시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30년전에 하던일을 나이들어서도 여전히 똑같이 생각을 한다는 마음이 들어 감회에 젖기도 했다.
요즘 하는 모든일의 기초는 경주에서 형성된 것이며 어디를 가나 자랑스런곳, 경주에서 자랐다는 걸 큰 기쁨이고 자랑으로 생각한다.
시장님이 모토로 하고 있는 `잘사는 도시`에 덧붙여서 경주를 전세계로부터 사랑받는 문화도시로 가꾸어 주시길 간곡히 당부드리고 싶다.
처음 막사이사이상 수상소식을 듣고 거절했었다. 평화를 위한 일을 하는데 상을 주는 것이 어색했다.
또한 승려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고, 더구나 우리민족을 위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만든 상을 받는다는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상은 법륜이라는 개인에 대한 시상이 아니라 1995년이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북한을 돕기 위해 애썼던 많은 시민, 종교인과 시민단체의 노력을 국제사회가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분단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한국사람 모두의 노력을 국제사회가 평가해주는 것이라는 마음에 상을 받기로 했었다.
북한동포나 난민을 돕는 이유를 설명드리겠다.
통일이 될려면 무엇인가 남북의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교나 이념, 제도적으로 남북은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런 모색 끝에 남북의 공통점은 단군이래 단일민족, 단일언어로 이뤄낸 반만년의 역사가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속에서 공통점을 도출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상고사에 대한 정리가 확립되지 않은 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공백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공백은 일제에 의한 해방이 미국의 공으로 생각하게됐고, 이런점은 민족사대주의의 뿌리가 된다.
이처럼 독립운동 역사에 공백이 빚어진 것은 사회주의적 관점에서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진행된 독립운동을 두고 남북이 서로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중국에서 진행된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고, 그때부터 북한의 실상을 확인할수 있었다.
처음에는 안내원이 설명하는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믿지 않았지만, 직접배를 타고 북한 국경을 둘러보면서 기아에 허덕이는 처참한 현실을 확인했다.그러나 국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인도까지 가서 활동하면서도 정작 내동포를 도울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국가나 민족, 종교라는 것이 사람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굶주리는 북한 아이를 돕는데 국가가 장애가 되는 현실이었다.
그뒤 국가나 이념, 종교를 떠나(초월해서) 활동을 할수 있는 것은 이때의 뼈저린 경험 때문이다.
눈앞에서 북한 아이를 보고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는 현실앞에서 일단 귀국했다.
그때부터 그동안 벌여왔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천해왔다.
그러나 그때는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으로 다시 냉전의식이 팽배하던 때였다.
이전부터 북한돕기운동을 벌이던 단체들의 활동도 위축되고 중단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런 현실 때문에 북한돕기를 멈출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온동본부`를 창립했고, 본격적으로 북한돕기 활동을 벌였다.
남과 북 양쪽 당국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북한동포에게는 식량이 필요하다`는 단 한가지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북한에 지원되는 쌀이 군비로 사용된다느니, 군량미로 사용된다고 비판했지만 북한의 어린이는 정치를 모른다. 북한 군인이라도 굶주린다면 마땅히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죄를 지은 죄인도 공기를 마실 권리가 있고 밥먹을 권리는 있다. 하물며 북한 군인이라는 이유로 굶주림이 합리화 될수 없다는 확고한 관점에서 활동을 한 것이다.
북한을 지원하는 쌀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지 붕괴를 촉진하는지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정치적인 입장으로 변질된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북한지원을 중단하면 지배집단으로부터 고통받는 북한주민들은 배고픔까지 겹쳐 2중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인도적 관점에서 북한동포던 난민이던 가리지 않고 지원활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도 많은데 왜 하필 남의 나라를 돕는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말은 같아도 정도의 차이는 정말 크다.
하루 수입이 우리돈 1000원으로 10명의 식구가 연명하는가 하면 수십명이 국제기구에서 지원한 천막하나에 의지해 생활하는 절대적인 가난은 국제사회가 구제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지원활동에 반대가 많고 비난이 있는데 어떻게 계속하느냐 하는 질문도 많다.
북한동포 돕기를 하면 남쪽 정부가, 북한을 탈출한 난민을 지원하면 북측 정권이 탐탁치 않게 여긴다.
국군포로나 미전향 장기수 문제도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도 지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인도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둘다 이념의 희생자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은 항상 환영받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필요로)하는 것이다.
경제적 손실, 사회적 비난, 정치적 탄압등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꼭 필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인데 나서는 사람이 없을 때 바로 `우리`가 하는 것이다.
필요한 일에 나서는 사람이 많으면 진정한 봉사자는 그 자리를 비워줄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와 시민·사회단체는 항상 경계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분담이 이뤄져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북한동포를 돕지 않을때는 종교·사회단체등 민간이 앞장섰고, 김대중 정부 들어서 남북 정권이 교류하고 지원할 때 정부가 직접 하기 어려운 북한을 탈출한 난민동포돕기 활동을 민간단체가 벌였던 것이다.
이제는 난민돕기 활동은 국제사회로부터 어느정도 인정받고 정부로부터 용인받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정부가 직접 제기하기 어려운 북한사회의 인권문제를 종교·사회단체들이 준비하고 제기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와 종교·민간 단체들은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이뤄지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자발적 활동영역이 엄청나게 확장됐다.
경주시의 발전도 시장이나 공무원, 시의원의 몫이 있지만, 문화재 보호등의 영역에서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그만큼 중대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개인소득 1만불 이상으로 OECD가입국가다.
당연히 GDP의 0.1%를 제3세계 저개발 국가와 사회를 위해 지원해야 하지만 한국의 경우 0.02%에불과한 실정이다.
외국에서 도움받을 생각만 했지 도움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전세계에서 12억명이 1일 1달러의 수입도 되지 않는 절대 빈곤층으로 기아,문맹,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제 우리도 세계적인 안목으로 책임을 갖는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고통받는 현실을 떠나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곳에 함께 할 때 이뤄지는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대승보살의 길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교간의 협력, 국제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리나 사상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며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치료와 약이 필요하듯이 삶의 현실속에서 구체적인 사안의 해결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경주 역사에서 우리는 원효라는 훌륭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화랑으로서 이바지했고, 통일뒤에는 세속의 영광을 뒤로하고 출가하여 수행정진에 몰두했다.
개인의 정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회향하는 수행정진을 한 것이다.
당시 불교가 상류층, 지배층을 위한 불교로 타락했을 때는 기꺼이 불교를 버리고(파계하고) 현실속에서 자비를 실천했다.
그 원효가 경주서 자랐고, 분황사에서 수행했다.
그러한 역사를 보유한 자랑스런 경주시민으로서 이제 남북화해 시대, 통일로 가는 시대 큰 역할을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종교를 뛰어넘어,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직업을 뛰어넘어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눈물흘릴줄 아는 진정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곧 보살이다.
주린자에게는 밥을, 가진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의사는 아픈사람에게, 청년은 노인을, 아이는 어른이 돌보아야 한다.
이러한 일은 희생과 봉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다.
利他는 곧 利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