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주로 불리는 나라시(奈良市)는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오사카에서 약 1시간(전철 30분) 거리에 있다. 710년부터 784년까지 수도였던 나라는 일본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당시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때문에 불교와 관련한 사찰이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나라시에 산재한 문화재 현황을 살펴보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총855점이다. 그중 국보120, 중요문화재553, 현지정문화재105, 시지정문화재89, 기타33점이다. 나라현(奈良縣)의 현청(도청)소재지인 나라시는 총면적 2백11.6㎢, 인구 37만명의 일본고도다. 이러한 도시특성 때문에 지난 70년 경주와 자매결연을 했다. 나라는 경주보다 인구도 많지만 시세도 월등하다. 예산규모는 경상북도 전체예산과 비슷한 수준이다. 나라는 1차산업은 2%에 불과하고 3차산업이 70.6%를 차지하고 있다. 주 산업이 관광이고 오오사카의 베드타운으로 소비가 활성화된 도시다. 또한 나라는 환경과 복지분야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나라시장은 3선의 오오가와 야스노리(大川靖則 71세)씨 이다. ○ 주요관광지 -도다이지(東大寺): 불교에 의한 진호(鎭護)를 바랐던 천무천황은 8차례의 주조와 9년의 세월을 들여 752년에 대불을 완성했다. 지금의 대불전은 건립당시의 2/3에 불과하지만, 현재 세계최대의 목조건축물이며, 금동불은 높이 15m, 무게 452톤이다.(세계문화유산) -고후쿠지(興福寺): 710년에 수도를 지금의 나라로 천도함에 따라, 아스카에서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기고 이름도 흥복사로 고쳤다. 나라의 상징인 5중탑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과 불상들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이 절의 역사적 무게를 잘 말해주고 있다.(세계문화유산) -나라공원(奈良公園): 1880년에 세워진 공원으로, 동서 4km, 남북 2km의 규모다. 1922년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공원 안에는 흥복사와 동대사, 춘일대사등이 있으며, 이 일대에 약1200마리의 사슴을 방목하고 있어, 사슴공원으로도 불린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경관이 매우 인상적이다. -야쿠시지(藥師寺): 680년 덴무천황(天武天皇)이 황후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지은 절이다. 처음에는 후지와라쿄에 건립했으나, 나라로 천도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수차례의 화재로 동탑만이 창건당시 8세기경의 것이고 금당과 서탑은 1981년에 재건되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 민간단체와의 자매결연 라이온즈 클럽(1970. 6. 26) 로타리클럽(1970. 7. 29) 와이즈맨(1971. 10. 14) 청년회의소(1974. 9. 3) 보이스카우트(1974. 4. 6) 걸스카우트(1979. 8. 4) 탁구협회(1993. 9. 4) 그외 야구협회, 축구협회, 그라운드골프, 연식정구, 하키 등의 교환경기를 실시하고 있다. 벳부에서 배를 타고 나라시로 이동했다. 우리일행은 배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8시 40분 오오사카 남항에 도착하니 나라시 미나미다 부시장, 시미즈 국제교류 참사(국장) ,부리미 의회사무국 차장, 히노 과장 등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오오사카에서 나라까지는 1시간 남짓 소요됐다. 나라의 하늘은 맑고 구름이 조금 낀 따뜻한 날씨였다. 유적지를 안내하는 이정표들이 많이 보였고, 거리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깨끗했다. 시가지에 펼쳐진 나라공원에서는 수많은 사슴들이 노닐고 있었다. 나라의 첫 인상은 참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은 나라에 도착해 먼저 동대사로 안내 되었다. 동대사는 나라시대에 효무천황이 불력으로 흉년과 질병 등 여러 가지 재앙들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많은 절을 세웠는데 그 때의 시대적 배경으로 세워졌다. 동대사는 시가지와 인접한 나라공원 안에 있었으며 법륭사와 함께 나라의 양대 사찰로 불리는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다. 동대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많은 사슴들이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으며 놀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사슴을 신의 전사로 여겨 신성시하며 보호하고 있었다. 사슴은 1천2백년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현재 약 1천3백마리의 사슴이 나라공원 일대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나라공원을 일명 ‘사슴공원’이라고도 부른다. 동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대문(사천문에 해당하는 정문)은 국보로 지정되어 닫혀있었고 옆문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안내하는 스님에 따르면 동대사는 3번에 걸쳐 화재가 있었으며 대불전은 건립당시의 11칸이었으나 복원과정에서 축소, 지금은 7칸(2/3규모)으로 복원됐다. 그러나 현존하는 목조건축물로는 세계최대로 폭(가로)이 57m, 깊이(세로) 50m, 높이가 48m이며 바깥에서 보면 2층이고 내부는 단층이었다. 지붕 위의 치미(물고기에 꼬리를 본떠서 만든 것인데 화재를 막아 준다는 의미)가 금으로 장식돼 있었으며 정문 위쪽에 쪽문이 있어 문을 열면 바깥에서도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올해가 동대사 불상이 조성된지 1천2백50년이 되는 해여서 지난달 큰 법요식 때 문을 열어 많은 시민들이 앉아서 부처의 얼굴을 관람했다고 한다. 원래 저 문은 매년에 1월 1일과 8월15일 두 번 문을 연다. 그래서 1년에 이틀 동안은 대불전 앞마당에서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스님은 우리 일행을 대불전 불단위로 안내했다.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으나 특별히 우리일행을 이곳으로 안내해 불상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높이 15m의 좌불인 본존불은 3m의 연화좌대에 모셔져있었고 연화좌대의 복화는 별 장식이 없었으나 앙화에는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화엄세계가 그림으로 장엄되어 있었다. 많은 불상과 보리수 등이 선각으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스님은 불상을 설명하면서 화엄경의 내용 중 연기설을 인용해 “신라불교의 전래가 오늘에 이어져 경주와 나라가 자매를 맺고 또 우리일행이 이곳에 왔다”는 인연을 강조해 일행들을 숙연하게 했다. 불상은 4백52톤의 금동으로 749년에 조성되었으나 855년의 대지진으로 머리부분이 떨어졌고 지금의 불상은 1692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복원했던 불상의 머리부분과 좌대 일부의 색깔이 원형과는 차이를 보였다. 불상의 왼손 손바닥에 성인 20여명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불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상은 매년 8월경에 한번 청소하는데 100명의 인원이 동원되며 천정에서 곤도라를 타고 대형건물에 유리 닦는 것처럼 청소한다고 했다. 우리일행은 불단을 내려와 법당을 둘러보았다. 법당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48m의 대불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원래 한 개의 통나무 기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통나무로 심을 넣고 둘레에 송판을 대고 장석으로 고정시키는 방식, 즉 2중구조의 방식으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불상 동북쪽에 있는 한 기둥의 하단부에 사람이 드나들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쁜 기운이 이쪽을 통해 빠져나가라고 만든 것이라는 설과 불상의 콧구멍 크기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 부처가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스님이 “사람들이 이곳을 통과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소개하자 우리일행은 서로 ‘들어가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법당 앞에는 목각으로 조성된 빈두루존자상이 있었다. 이 불상의 발을 만지고 아픈곳을 만지면 낫는다고 해 일행들이 대부분 불상의 발을 만졌다. 대불전 앞에는 우리나라 석등에 해당하는 팔각등롱(八角燈龍 국보)이 금동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동대사의 대부분이 지진이나, 벼락, 전쟁, 화재로 원형을 훼손당한데 반해 1천2백여년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운 등롱이었다. 보주, 옥개, 중대, 화사, 간주, 기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화사(火舍 불 피우는 함)가 팔각으로 여덟면이 격자문양의 투조판 위에 불보살과 사두사자(머리넷의 사자)상이 각각 네 면씩 장식되어있었다. 스님은 바닥에 깔린 많은 돌들 중에 한 줄을 가리키며 “이 돌을 밟고 걸어보라”고 말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에게 스님은 “이 돌은 한국에서 갖고 온 돌”이라고 소개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는 여러 가지 돌들이 줄지어 깔려 있었다. 가운데 검은 돌은 ‘인도’, 그 다음은 ‘중국’, ‘한국’, 나머지는 ‘일본’ 돌로 불교의 전래경로를 표현하기 위해 현지에서 돌을 직접 갖고 와 깔았다고 했다. 이곳 동대사에서 한국 돌을 밟아보는 맛은 또 새로웠다. 우리일행은 한글로 된 동대사 안내책자를 선물 받고 동대사 대불전을 뒤로하고 종루, 이월당과 삼월당 등 동대사 주변 사암들을 둘러보았다. 특히 이월당 난간에서 내려보는 동대사의 경치는 장관이었다. 사암들의 골기와 지붕들과 때 맞춰 붉게 물든 단풍의 어우러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점심식사 후 우리일행은 나라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사가 가까워지자 차가 서행했다. 시청측과 교신하며 준비상황을 점검하는 것 같았다. 나라시청에 도착하자 오오가와시장을 비롯한 7백여명의 직원들이 도열하여 박수로 우리일행을 환영했다. 나라에 있는 각 언론사에서 나온 10여명의 기자들의 취재경쟁도 치열했다. 접견실은 시장실이 있는 5층 회의실에 마련돼 있었다. 우리일행은 먼저 경주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경주와 관련된 사진들과 32년간 자매교류를 하는 동안 경주에서 전달한 금관, 성덕대왕신종 등 각종 기념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정면에 석굴암 불상사진이 인상적이었다. 경주방과 인접한 회의실에서 간단한 환영식이 있었다. 회의실은 20평정도 규모에 회의용 탁자들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양국기와 화반이 중앙에 배치되었다. 19명의 역대 시장의 초상화가 양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정면 기둥에는 우사시민 헌장이 걸려있고 비천문의 탁본 두 점이 앞쪽 양 벽면에 걸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오오카와 나라시장은 인사말에서 “백시장의 첫 방문을 나라시민들과 함께 열렬히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에, 백시장은 “나라시청에 도착했을 때 나라시청 전직원들의 열렬한 환영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고 “경주는 전국 노령인구 평균치의 3%가 더 많다”고 소개한 뒤 “짧은 일정이지만 노인복지에 대해 많이 배워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오오카와 시장은 경주의 나자레원을 예를 들며 “경주야말로 노인들을 잘 공경하는 복지도시”라고 답했다. 기념품을 교환하고 오오가와시장은 시장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시장실은 20평 정도의 규모였는데 시민들이 보내온 기념품과 각 도시에서 받은 기념품들이 아기자기하게 진열되어 있어 마치 어느 미술전시장에 온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오가와시장은 “시민들이 보내온 엽서나 각종 선물을 모두 보관한다.”며 특히 “시민들이 편지를 보내오면 직접 답장을 써서 보낸다.”고 소개했다. 그림을 좋아한다는 시장은 시민들에게 편지를 쓸때 내용은 짤막하게 쓰고 그림을 그려서 보낸다고 한다. 시장실에는 시민들이 보내온 엽서들과 인형, 꽃 등 갖가지 소품들이 잘 정돈되어있었다. 나라시종합노인홈-나라시가 노인들을 위해 설립한 종합 복지시설 이번 공식 일정에서 백시장이 가장 관심을 보인 곳이 이곳 복지시설이었다. 백시장은 오오가와시장과 기회 있을 때마다 복지분야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특히 노인복지와 노인요양시설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따라서 복지시설 방문은 오오가와 나라시장이 직접 안내했다. 화락원은 지난 98년 나라시가 건립한 노인복지시설로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낮은 산기슭에 아담한 2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공식명칭은 나라시종합노인홈 ‘화락원’이다. 화락원은 총면적 4천4백평에 연건평 3천2백평 규모의 시설을 갖춘 대규모 종합노인복지시설이다. 이곳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부터 질병이 있는 환자, 치매노인, 실버타운, 재택노인 가족들의 간호지원까지 다양한 노인복지시설이 다 갖춰져 있다. 화락원은 크게 5가지 시설로 대별된다. 1, 양호노인홈, 2, 특별양호노인홈, 3, 노인 디-서비스센타, 4, 재택간호지원센타, 5, 케아 하우스로 구분된다. *나라시 양호노인홈 양호노인홈은 저소득세대(시민세 균등비율이하)에 속하는 65세이상 노인으로서 거동이 부자유스럽거나 형편상 집에서 생활이 곤란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로 총 150명이 1인 1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라시 특별양호노인홈 특별양호노인홈은 65세 노인들 중 질병 때문에 계속 간호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집에서 간호받기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시설로 특히 치매환자나 중증 장애자들이 많았으며 총 1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1인실 24, 2인실 32, 4인실 3실을 갖추고 있었다. *나라시 노인 디-서비스센타. 노인 디-서비스센타는 집에서 생활하는 노인으로서 질병이 있는 노인들을 이곳으로 모시고 오면 치료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로 1일 25명이 통근치료하고 있다. *나라시 재택간호지원센타 재택간호지원센타는 질병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등 가정에서 간호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적절한 간호방법과 재택간호에 대한 여러 가지 상담, 관계기관의 협조, 연락 조정역할을 행하는 시설이다. *나라시 케아하우스 케아하우스는 일종의 실버타운이다. 60세 이상(부부인 경우 한쪽이 60세 이상)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고령으로 생활이 불안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으로서 가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노인들이 저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현재 30명이 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화락원은 약 300여명의 노인들을 수용하고 있고, 많은 재택노인들이 이용하는 그야말로 종합노인복지시설이었다. 우리일행은 첫째, 시설규모에 놀랐고, 둘째, 호텔을 방불케하는 질 높은 시설수준에 놀랐으며, 셋째, 시설의 다양화로 노인들의 모든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종합적인 시스템에 놀랐다. 백시장은 “내년에 국고지원을 받아 노인요양병원을 지을 계획인데, 중복투자를 피하고 종합노인복지 시스템을 갖춘 화락원은 좋은 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방은 기본적으로 침대를 설치해두었지만 혼자 침대에 올라가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다다미방도 있었다. 이곳에는 대소변을 받아 내야하는 노인들이나 치매노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실내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악취나 지저분한 광경은 목격할 수 없었다. 일본의 노인들은 대부분 ‘개호보험’을 들고 있었다. 개호보험은 아프지는 않지만 보호와 간호가 필요한 노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보험으로 이곳 시설을 이용하는 노인들의 경우 비용의 90%는 보험에서 부담하고 10%는 본인이 부담한다고 한다. 의사는 상근하지 않고, 간호사는 늘 상주한다. 모든 방의 이용자가 벨을 누르면 램프에 불이 들어오고 경보음이 울려 간호사를 호출할 수 있는 이용자관리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청소, 간호, 악기연주, 노인들과 놀아주는 등 다양한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다. 일종의 실버타운 같은 케아하우스는 경제력에 따라 차등으로 적용되는 월세를 받는다. 많게는 월 20만엔에서 무료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식사를 제공해주고 건강정도에 따라 목욕이나 세탁은 본인들이 스스로 해결한다. 케아하우스는 요양원과 인접한 옆 건물에 별도로 시설되어 있었다. 오오카와 야스노리 시장은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복지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한 복지분야 전문가로 복지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시장취임 후 이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화락원도 나라시가 설립해 법인에 무료로 임대해 운영하고 있다. 모자가정 어머니와 정박아들의 일터 - 일하는 광장 사후 화락원과 인접한 곳에 또 하나의 복지시설이 있다. 사회복지법인인 ‘일하는 광장 사후’는 노인요양시설에 인접해 있지만 별도의 법인이었다. 부지면적 1천평, 건평 3백평의 2층 건물의 ‘사후’는 모자가정 어머니 50명과 정박아 60명 등 총 110명의 일터인 세탁공장으로 화락원과 마주보고 나란히 있었다. 나라시가 어린애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모자가정 어머니들과 정신박약아들을 위해 투자한 세탁공장이었다. 모자가정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출근해 탁아시설에 아이를 맡기고 마음 놓고 일하고 있었으며, 정신장애로 직장을 생각할 수도 없는 정박아들이 일하는 즐거움을 맛보며 꿈과 희망을 가꾸고 있었다. 단순한 일은 정박아들이, 난이도를 요구하는 다림질이나 기계조작은 모자가정 어머니들이 분담해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각 보육원이나 35군데의 수집소에서 모아온 세탁물을 처리하는 이곳은 최근에는 경영상태가 좋아져 나라시에서 지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했다고 한다. 일본에 이런 시설이 2천여개가 있지만 모자가정과 정박아가 같이 일하는 시설은 이곳이 유일하다. 하루 7시간 30분정도 일하며 모자가정 어머니들은 월12만엔, 정박아들은 월 6만5천엔 정도의 급료를 받는다. 세탁공장을 돌아보면서 백시장과 이의장은 정박아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을 위로했다. 이곳 법인의 이사장이 “나라시장은 일본에서도 복지에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진 시장이라 이런 시설을 해주었다”고 소개해 우리일행들은 박수로 감사했다. 이날 저녁 미츠이가든 호텔에서 백시장과 이의장의 나라시 특별명예시민증 수상식이 있었다. 우리일행이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서서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오가와시장을 비롯한 하시모도시의장, 시의원, 기관단체장, 경주명예시민, 자매결연단체 대표 등 2백여명이 참석했다. 오오가와시장은 “두 분의 명예시민증 수상이 양시의 교류확대와 우호발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백상승 경주시장과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의 나라시 특별명예시민증 수상이 있었다. 백시장은 인사말에서 “나라시의 명예시민의 한사람으로 양시의 교류와 우의를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내년 술과 떡 잔치, 벚꽃마라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시장님을 비롯한 나라시민들의 적극적인 참가와 성원을 부탁.”했다. 이어 이의장도 인사말에서 “앞으로 협력과 교류를 더욱 증진시켜, 양 도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만찬장에서 백시장과 이의장은 자리를 돌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고, 특히 이의장은 자리마다 건배제의를 해 평소 술 실력을 과시했다. 시의원들도 나라시 시의원들과 친교를 가졌으며 특히 강봉종의원은 32년전 경주와 나라의 결연성사에 주역으로 활동한 고 강봉조씨의 동생으로 밝혀져 많은 나라시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날 행사는 우리일행이 기립박수 속에 퇴장하는 걸로 끝이 났다. 다음날(12일) 아침 오오카와 시장이 마련한 조찬회를 끝으로 나라에서의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나라를 떠날 때 오오카와 시장을 비롯한 관계공무원들이 전송을 나왔으며 마에다 총무부장 일행은 공항까지 우리 일행을 전송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오오가와시장 / ▷대담: 김헌덕 발행인 ▷먼저, 열렬한 환영에 감사드린다. ▶백시장님, 이의장님과 같이 와 주셔서 대단히 기쁘다. ▷백시장, 이의장 두분께 명예시민증을 수여한 소감은? ▶나라시민이 되셨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양시 교류발전을 위해 일해 주시면 고맙겠다 나도 경주명예시민이기 때문에 하루도 경주를 잊은 적이 없다. ▷명예시민증은 언제 벋았나? ▶10년전에 받았다. ▷경주에 자주 오신 걸로 아는데, 경주를 평가한다면? ▶나는 동경 가는 것 보다 경주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경주는 나라와 너무 닮아 갈수록 친근감이 든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라 일년에 한차례 강의하러 간다. ▷경주의 어느 곳을 가장 좋아하는가.? ▶불국사, 천마총을 가장 좋아한다. ▷경주시장이 바뀌었는데 백시장에 대한 인상은? ▶백시장은 지금 3번째 보는데, 서안에서 처음 봤을 때 아주 온화하고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라에 돌아와 직원 5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에 경주시장이 새로 취임했는데 아주 훌륭한 분이 되셨다고 자랑했다. ▷술과떡 축제, 벚꽃마라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등에 나라시의 많은 관심과 참여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교류확대 계획은? ▶경주는 나보다 형님이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친근감이 간다. 앞으로 청소년, 민간단체, 스포츠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행정적으로도 사회복지. 환경 등 많은 교류가 이루어 질 것이다. ▷사실 시장실을 보고 퍽 인상적이었다. 시민들이 보내준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걸 보고 감동을 받았다. ▶(하하하...크게 웃으며)일본 전국의 시장들 가운데 나처럼 시장실을 꾸민 시장은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보내온 선물들을 소중하게 보관한다. 시민들의 편지에 즉시, 그리고 직접 답장을 쓴다. 그것도 그림을 넣어서 쓴다. ▷평소, 아주 즐겁게 생활하시는 것 같다. 생활신조는? ▶마음이 시민들과 통하는 시장이 되고 싶다. ▷경주 시민에 대한 메시지... ▶경주는 앞으로 엄청나게 발전할 것이다.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자. 경주와 나라가 협력하면 양도시가 더욱더 발전할 것이다. 경주시민여러분 노력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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