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나라에 도착해 먼저 동대사로 안내 되었다.
동대사는 나라시대에 효무천황이 불력으로 흉년과 질병 등 여러 가지 재앙들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많은 절을 세웠는데 그 때의 시대적 배경으로 세워졌다.
동대사는 시가지와 인접한 나라공원 안에 있었으며 법륭사와 함께 나라의 양대 사찰로 불리는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다.
동대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많은 사슴들이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으며 이리저리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사슴을 신의 전사로 알고 신성시하고 아끼며 보호하고 있었다. 사슴은 1천2백년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현재 약 1천3백마리의 사슴이 나라공원 일대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나라공원을 일명 ‘사슴공원’이라고도 부른다.
동대사의 가람양식은 일주문과 사천문으로 정형화된 우리의 전통양식과는 달랐다.
지금은 남대문(사천문에 해당하는 정문)은 국보로 지정되어 닫혀있었고 옆문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안내하는 스님에 따르면 동대사는 3번에 걸쳐 화재가 있었으며 대불전은 건립당시의 11칸이었으나 복원과정에서 축소, 지금은 7칸(2/3규모)으로 복원됐다. 그러나 현존하는 목조건축물로는 세계최대로 폭(가로)이 57m, 깊이(세로) 50m, 높이가 48m이며 바깥에서 보면 2층이고 내부는 단층이었다.
지붕 위의 치미(물고기에 꼬리를 본떠서 만든 것인데 화재를 막아 준다는 의미)가 금으로 장식돼 있었으며 정문 위쪽에 쪽문이 있어 문을 열면 바깥에서도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올해가 동대사 불상이 조성된지 1천2백50년이 되는 해여서 지난달 큰 법요식 때 문을 열어 많은 시민들이 앉아서 부처의 얼굴을 관람했다고 한다.
원래 저 문은 매년에 1월 1일과 8월15일 두 번 문을 연다. 그래서 1년에 이틀 동안은 대불전 앞마당에서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스님은 우리 일행을 대불전 불단위로 안내했다.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으나 특별히 우리일행을 이곳으로 안내해 불상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라고 했다. 비로자나불은 ‘빛난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진리의 본체를 일컫는 법신불을 말한다.
그러나 이곳의 본존불의 수인(손모양)은 불국사의 비로자나불과는 달랐다. 오히려 노사나불의 수인에 가까웠다.
높이 15m의 좌불인 본존불은 3m의 연화좌대에 모셔져있었고 연화좌대의 복화는 별 장식이 없었으나 앙화에는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화엄세계가 그림으로 장엄되어 있었다. 많은 불상과 보리수 등이 선각으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스님은 불상을 설명하면서 화엄경의 내용 중 연기설을 인용해 “신라불교의 전래가 오늘에 이어져 경주와 나라가 자매를 맺고 또 우리일행이 이곳에 왔다”는 인연을 강조해 일행들을 숙연하게 했다.
불상은 4백52톤의 금동으로 749년에 조성되었으나 855년의 대지진으로 머리부분이 떨어졌고 지금의 불상은 1692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복원했던 불상의 머리부분과 좌대 일부의 색깔이 원형과는 차이를 보였다.
불상의 왼손 손바닥에 성인 20여명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불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상은 매년 8월경에 한번 청소하는데 한번 청소할 때 100명의 인원이 동원되며 천정에서 곤도라를 타고 대형건물에 유리 닦는 것처럼 청소한다고 한다.
스님은 건물과 불상의 규모를 집중적으로 자랑했다.
우리일행은 불단을 내려와 법당을 둘러보았다. 법당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48m의 대불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원래 한 개의 통나무 기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통나무로 심을 넣고 둘레에 송판을 대고 장석으로 고정시키는 방식, 즉 2중구조의 방식으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동대사 모형도가 본존불 뒷켠에 만들어져 있었다. 쌍탑 가람방식이었다. 목조로 세워졌다는 탑의 높이가 1백m 였다고 한다. 벼락으로 불타버린걸 300년전에 복원했지만 한쪽은 다시 벼락을, 나머지도 불타 지금은 없다고 했다.
불상 동북쪽에 있는 한 기둥의 하단부에 사람이 드나들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좋지 않은 기운이 이쪽을 통해 빠져나가라고 만든 것이라는 설과 불상의 콧구멍 크기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 부처가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스님이 사람들이 이곳을 통과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소개하자 우리일행은 서로 ‘들어가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법당 앞에는 목각으로 조성된 빈두루존자상이 있었다. 이 불상의 발을 만지고 아픈곳을 만지면 낫는다고 해 일행들이 대부분 불상의 발을 만졌다.
대불전 앞에는 우리나라 석등에 해당하는 팔각등롱(八角燈龍 국보)이 금동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동대사의 대부분이 지진이나, 벼락, 전쟁, 화재로 원형을 훼손당한데 반해 1천2백여년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운 등롱이었다. 보주, 옥개, 중대, 화사, 간주, 기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화사(火舍 불 피우는 함)가 팔각으로 여덟면이 격자문양의 투조판 위에 불보살과 사두사자(머리넷의 사자)상이 각각 네 면씩 장식되어있었다.
스님은 “1천2백년 동안 잘 관리 돼 왔지만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와 산성비로 인해 돔 부분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며 환경보전을 당부해 환경문제가 이젠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전체의 숙제임을 주지했다.
스님은 우리일행에게 바닥에 깔린 많은 돌들 중에 한 줄을 가리키며 “이 돌을 밟고 걸어보라”고 말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에게 스님은 “이 돌은 한국에서 갖고 온 돌”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는 여러 가지 돌들이 줄지어 깔려 있었다.
스님은 “가운데 검은 돌은 ‘인도’, 그 다음은 ‘중국’, ‘한국’, 나머지는 ‘일본’ 돌”이라고 말하고, 불교의 전래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현지에서 돌을 직접 갖고와 깔았다고 했다.
이곳 동대사에서 한국 돌을 밟아보는 맛은 또 새로웠다.
우리일행은 며칠 전 한국어로 처음 출간된 동대사 안내책자를 스님으로부터 선물 받고 동대사 대불전을 뒤로하고 종루, 이월당과 삼월당 등 동대사 주변의 부속 사암들을 둘러보았다.
특히 이월당 난간에서 내려보는 동대사의 경치는 장관이었다. 사암들의 골기와 지붕들과 때 맞춰 붉게 물든 단풍의 어우러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