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째 박의사 자료수집, `출생지 경주 증명` 애쓰는 노동휘씨
마음에 새겨서 움직이지 않는 생각, 이런 것을 국어사전에서는 집념이라 부른다.
박의사가 경주사람임이 분명하고,그렇기 때문에 이미 `울산사람`으로 규정된 분이지만 경주사람으로 복원함으로써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야한다는 생각하나로 20여년동안 꾸준히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또 이를위해 노력해온 불국동 사무소 공무원 노동휘씨(55)는 사전의 풀이대로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다. 그런만큼 그는 박상진 의사에 관한한 경주지역 최고의 전문가로 통한다.
격무와 박봉, 읍면동사무소에만 근무해온 공무원 노씨에게 박씨를 제대로 연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는 박상진의사를 경주사람으로 복원하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가?
박상진의사와 관련해 경주에서 가장 정통하다는 그를 만나 취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사무소의 바쁜일과 때문이었다.
당연히 취재를위한 세번의 만남은 모두 점심시간에 이뤄졌다.
-박의사를 처음 알게된 것은 언제인가?
=80년 초 외동읍사무소에 근무할때다. 우연히 울산 학성공원에 갔었는데 박의사를 추모하는 비문에 `외동읍 녹동리`로 적혀 있는 것을 봤다.그래서 관심을 갖게 됐다.
`왜 경주사람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울산에 있을까?`
그 뒤 읍사무소에 근무하는 동안 시간나는 대로 외동읍에 거주하는 나이드신 어른들을 만나 박의사와 관련한 증언을 들었다. 그결과 박의사는 분명히 외동사람, 경주출생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됐고, 늦기전에 박의사에 관한 기록을 나름대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자료수집은 어떻게 했나?
=어른들을 만나 말씀을 주로 들었다. 구전을 채집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말씀을 통해 중요한 것도 여러 가지 확인할수 있었다.석계리 임문혁씨(박의사의 친구)집에 박의사의 친필 서한을 확인한것도 그때다.
-울산에서 추모사업이 막 시작되던 시점인데 굳이 경주사람임을 증명하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삼국통일, 고려 창업, 조선조 임진왜란때의 문천회맹, 성리학의 태두 이언적 선생의 활약등에서 알수 있듯이 경주와 경주사람들은 한반도 역사에서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유독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경주를 대표할만한 운동가도, 또 기록도 없다.
그런가운데 독립운동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던 박의사가 경주사람임을 알았을 때, 전율을 느꼈다.
-박의사와 관련한 자료수집 활동은 계속할 계획인가?
=울산에서는 광복절만 되면 생가터와 기념비등지에서 각급학교 교장, 기관단체장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를 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런데 경주는 어떠한가?
박의사가 항일 독립운동에 끼친 지대한 공적을 제대로 알리고 복원하는 것은 출생지를 떠나 울산이나 경주가 힘을 합쳐서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공직생활을 하는동안에는 시간적으로 제약이 많은 한계가 있지만 공직생활을 마친뒤에는 박의사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하는데 여생을 바칠 각오다.
박의사의 출생지 후손으로서 경주사람들은 최소한 생가터에 조그마한 기념조형물이라도 설치하여 청소년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것으로 생각한다. 생가를 복원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지만 한가지씩 실천할수 있는일부터 했으면 좋겠다. 그런일에 도움을 줄수 있었으면 좋겠다.
황성공원 입구에 있는 임란의사 창의비옆에 항일 독립지사를 추모하는 기념비라도 세워졌으면 좋겠고, 박의사의출생지인 외동읍에서는 매년 8.15때 열리는 읍민축구대회등에서 박의사를 추모하는 간단한 행사라도 병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공직자로서 인터뷰에 나서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한사코 거부하던 그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많은 이야기를 쉴새 없이, 그러나 진지하게 쏟아냈다.
그에게서 박의사는 일제하 경주지역의 독립운동을, 항일운동을 설명하는 키워드였다.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경주사람들에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경주인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인물로 박의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박의사 추모사업에 열심인 울산사람들을 욕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 울산사람들이 추모회가 뭐다 만들당시에 경주사람들이 조금만 관심갖고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박의사는 아무런 논란없이 출생지가 경주인, 경주사람으로 제대로 평가받았을 겁니다.무관심했던 경주사람들 탓이지요. 그러나 늦지는 않습니다. 모든기록이 너무나 분명하게 남아 있으니까요. 경주사람 제사는 경주후손들이 경주에서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물 스냅 사진
2.박의사 관련 자료 집대성 손우익씨
불국동 사무소에 근무하는 노동휘씨가 자료수집에 열심이었다면, 이를 토대로 자료를 집대성한 책 발간한 이가 있다.
98년 외동로타리클럽 회장을 지낸 손우익씨.
손씨는 회장을 맡아 있는동안 외동읍사무소에 오랫동안 근무했던 노씨의 도움을 받아 `경주를 빛낸 인물 고헌 박상진의사`라는 자료집을 발간했다.
손씨가 회장으로 있을 당시 외동로타리클럽은 51쪽 분량의 자료집 1천부를 제작, 관내 기관, 단체는 물론 마을 경로당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료집을 배포하고, 직접 박의사의 일대기를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손씨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셨던 박의사는 경주인 모두의 자랑"이라면서 "박의사의 유사를 빠짐없이 정리하고 널리 파급함으로써 의사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바로잡아 경주인의 자긍심을 키워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발간했다"고 말했다.
*인물 스냅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