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의 큰 별 박상진
박상진의사는 경주인
(하)
박상진의사의 출생지가 경주임을 입증하는 문헌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의 사회문화를 광범위하게 기록한 동경통지에 박상진의사의 부친과 조부가 모두 경주사람으로서 과거에 등제한 인물로 기록된 점으로 미뤄볼 때 박상진의사는 출생전에 일가가 이미 경주에 살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 출생지 논란의 원인
1884년 밀양박씨 시규와 어머니 여강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박상진의사는 생후 백일째 되는날 백부 시룡에게 양자로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박의사 출생의 논란이 시작된다.
별다른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호적부가 없는 상태에서 백부에게 양자로 입적됐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출생지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박의사가 울산 송정리에서 출생했지만, 그 뒤 박의사가 당시 과거제도하에서 울산보다는 입신양명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경주로 이사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박의사 추모운동이 막 시작된 80년 10월, 박 의사의 종형인 박모씨가 울산시 북구의 한 가옥을 생가터로 지목하면서 출생지가 느닷없이 울산으로 사실상 규정지워졌다.
울산지역에서 박의사와 관련한 단체는 많지만, 그러나 어느 한 단체도 박의사의 생가와 관련해서는 뚜렷한 근거를 밝혀놓지 않고 있으며, 설명 또한 전무하다.
그렇다면 박의사의출생지는 울산인가, 경주인가?
행정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유일하다.
외동읍 사무소 호적부에 기록된 것으로. 호적부에는 박의사의 주소가 `외동읍 녹동리 469번지 박상진`으로 명기돼 있다.
이 기록이 박의사의 출생지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쪽은, 박의사의 출생지는 울산이었지만 출생한지 20여년이 지나 일제에 의해 호적부라는 것이 생겼고, 그때는 이미 박의사가 울산에서 경주로 이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록상으로는 경주로 호적이 등재돼 있지만 출생지는 울산이었다고 강변한다.
과연 그런가?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뒤엎는 기록, 즉 박의사가 태어나고 또 자란곳이 경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이 문헌상으로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음이 본지취재결과 밝혀졌다.
■경주관련 문헌에 박의사 가족 기록 분명히 남아
동경통지에 조부, 부친, 백부등의 과거 등제 기록 또렷이 남아있어
경주지방의 정치,경제,문화,사회,군사등 모든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상세하게 서술한 동경통지 7책14권에는 경주출신으로서 구한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인명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에서 박의사의 생부 박시규와 백부 박시룡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동경통지는 조선조 인조때 경주의 유림인 권응생등이 편찬한 동경지를 현종 10년(1669년) 경주부사 남지훈이 동경잡기로 다시 썼고, 이를 기초로 1910년 조선고서간행회가 인쇄본으로 간행했다.
3년뒤인 1913년,당대의 석학이었던 최남선, 정인보등이 주관하던 광문회가 활자본으로 중간했고,이는 또다시 1933년 동경통지로 다시 간행됐다.
`동경통지` 13권에는 박의사의 생부 시규는 고종 을유에 등제하여 시독관을 지냈고,백부 시룡은 교리 박영손의 후손으로 고종 경인에 등제하여 역시 시독관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의사의 생부와 백부 모두 경주사람으로서 고종때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뿐만아니다.
이어서 13권에는 박의사의 조부 박용복은 고종 경오에 진사하고, 북부도사를 지냈다고 적어놓았다.
박의사의 조부에서부터 생부, 백부 모두 고종때 경주에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생부, 큰아버지가 모두 경주 외동읍 녹동리에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록은 박의사의 출생지가 외동읍 녹동리였음을 입증하는 움직일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박의사의 유년기 외동읍 녹동리 일대에서 전해오는 각종 일화, 일본 고등경찰의 요시찰 기록, 판결문등에서 확인할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초기 항일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대한광복회 초대 총사령 박상진의사는 자라난 곳이 경주일뿐만 아니라 출생지 또한 경주였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박의사의 출생지가는 어느틈엔가 울산이 되었고, 각종 추모사업도 인근 울산시에서만 유독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독립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순국열사의 독립정신과 애국 애족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데 있어서 경주시민과 울산시민이 따로 있을수는 없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던 큰 인물이 출생지 조차 바르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고, 이땅의 산천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길렀을 생가 또한 후대의 무관심속에 콩밭으로, 고추밭으로 내버려진 현실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박의사와 관련한 기록과 역사를 바르게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위해 헌신했던 순국열사를 제대로 추모하는 첫걸음이다.
역사는 진실의 기록이어야 하고, 진실은 모든 가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경주시와 시의회도 한 때 박상진의사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기는 했다.
경주시는 2000년 12월 12일, 경주시의회 제56차 정례회에서 이종근 의원은 박상진의사의묘소 정비계획 및 문화순례지로 지정할 의향을 묻는 시정질문을 했다.
당시 경주시 김인석 기획문화국장(현재 행정지원국장)은 "보훈청이나 박상진의사 추모회등에서 추진할 사항이지만 시에대한 지원요청이 있을 때 (묘소정비계획을) 검토하도록하고, 관광안내도에 게재하는등 관광객이 찾을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적어도 현재상태로 볼때 그 답변은 공허한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2년전 경주시의 답변,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가?
이제 경주시가 다시한번 답변을 내놓을 차례다.
*문환기록 사본, 스냅가로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