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사 생가 복원 가능, 문제는 경주시의 의지.
출생지 논란과는 별개로 박의사가 유년기를 보냈던 생가가 외동읍 녹동리 469번지 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박의사는 아버지 박시규와 어머니 여강이씨사이에서 태어나 생후 100일만에 자식이 없었던 백부 시룡의 양자로 갔는데 외동읍 녹동리 469번지 5백여평의 터에는 당시 생부와 백부의 집이 두채 나란히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현재 녹동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됐다.
이 마을 주민 윤병동(48.)씨는 “5칸짜리 기와집 두채 가운데 한채는 28∼30년전(1974년경)에 먼저 철거가 됐고,또다른 한채는 1980년 초반까지는 빈집으로 있어서 청년시절 빈집에서 친구들과 자주 모여서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고 말했다.
윤씨는 현재 밭으로 변모한 박의사 생가터에서 고추와 콩등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윤씨에 따르면 현재 이 터는 울산시 호계리 석모씨 소유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취재과정에서 박의사 생가 두채 가운데 먼저 없어진 한채는 기와장을 비롯해 대들보등 모든 건축자재가 전혀 파손되지 않고 그대로 옮겨져 현재 오천 정씨의 제실로 재건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박의사 생가터와는 불과 1킬로 남짓 떨어진 녹동리 산848번지에 있는 이 가옥은 재건축과정에서 한칸이 축소돼 현재 4칸짜리 기와집으로 건축됐으며, 박의사 집에 걸려 있었던 괘매당이라는 현판도 그대로 걸려 있었다.
현재 이곳에서 거주하며 오천정씨 선산을 관리하고 있는 정낙교(65세)씨는 “이 집은 28년전 박상진의사 가옥을 매입하여 그대로 옮겨지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읍사무소의 호적부에 기록된 지번에 박의사의 생가터가 존재하고,또 생가터에 존재했었던 가옥도 원형 그대로 인근에 옮겨져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박의사 생가의 복원에 필요한 `필요조건`은 갖춘셈인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충분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행정기관의 복원의지다.
울산시에서는 일개인의 구술만을 근거로 송정동의 한 가옥을 생가로 지목하고 1997년 울산시문화재 자료로 지정했고, 울산청년회의소는 인근의 한 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매년 광복절마다 울산시장, 시의회의원등 기관단체장을 초청한 가운데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울산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러나 정작 박의사가 유년시절 맘껏 뛰어다니며 호연지기를 길렀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생가터는 이를 기념하는 안내판 조차 하나 없이 그저 밭으로 방치되고 있다.
뿐만아니다.
박의사의 묘가 있는 내남면 노곡리로 향하는 길 입구 마다에는 울산청년회의소가 각종 교통안내판을 오래전부터 설치해놓고 있다.
그 이정표는 나라독립을위해 헌신했던 경주의 큰 인물 박상진의사에게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오늘을 살아가는 경주사람들에게 "도대체 경주사람들은 기리고 추모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길래 이런 훌륭한 사람에게 이토록 무관심한가”라는 준열한 꾸짖음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인물만들기에 열심인 울산사람들이 경주시민에게 보내는 야유처럼 보였다.
*사진-생가터 가로 1장, 박의사의생가(가옥) 1장, 묘역으로 향하는 안내판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