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광주의 5.18국립묘지를 찾은 여당대표가 추모 차원에서 묘비를 만지다 상석을 밟는 결례를 하였다는 정치가십란 소식을 접하고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어서 발길을 선도산 자락의 태종무열왕릉비를 향했다.
역사문화에 조금만 관심을 두고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무덤 앞에 최초의 상석을 설치한 곳이 태종무열왕릉이고 가장 아름다운 묘비 또한 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임을 알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알려진 광주묘역에서의 문제의 현장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묘비의 윗부분이 둥글게 가공된 형식이었다.
묘비는 일반적으로 머리 부분인 비수(碑首)와 몸통부분인 비신(碑身) 그리고 받침부분인 비좌(碑座)로 나뉘어진다. 예부터 비석의 윗부분은 ‘비수’ 또는 ‘비액(碑額)’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뾰족한 형태(규수[奎首])와 반원형(훈수[暈首])과 방형(일반적으로 용 문양을 조각하기에 이수라고 부른다)의 세 종류가 있었다.
중국 후한서(後漢書) 기록에 의하면 비수의 형상에 따라 묘비의 이름도 달라지는데, 비수가 네모난 것은 ‘비(碑)’, 둥근 것은 ‘갈(碣)’이라 불렀다 한다.
비액에는 비제(碑題)를 새겼는데, ‘전서’로 쓰면 ‘전액’, ‘예서’로 쓰면 ‘제액’이라고 했다한다. 그리고 후대에는 ‘해서’나 ‘행서’로도 비제를 쓰기도 했단다. 태종 무열왕릉비로 이수의 정면 중앙 하단에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 글자의 비제가 쓰여져 있다.
사적만을 기록해서 세우는 비석의 경우에는 비수 위에 지붕모양의 덮개를 올리는 방식을 채용했다고 한다.
비의 몸통부분인 비신(碑身)에는 고인의 업적 등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지기도 한다. 당나라 이전에는 유명한 서예가가 붉은 글씨로 직접 비문을 썼는데, 당나라 이후에는 종이에 쓴 다음 돌에다 새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석의 받침인 비좌(碑座)는 방형과 귀부(거북이 모양의 기좌) 등의 형식으로 나뉘어 진다. 네모 방형의 비좌엔 둘레에 문양을 새겼고, 거북이 모양 귀부는 위진남북조시대 이후에 출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명나라 청나라 이후부터는 용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은 형상으로 비좌를 만들었는데, ‘비히’ 또는 ‘패하’라고도 불리는 용의 새끼 종류로 완전한 용은 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잘 나르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누구나 조상 묘에 화려한 상석과 묘비를 마음대로 세우면 되지만 봉건시대인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사회적 등급에 따라 비갈의 제자, 비의 각 부분의 치수·형식·문양도 제한을 받았다.
예를 들면 당나라 때는 5품 이상 관리는 ‘높이 9척 이하 이수귀부비’, 7품이상 관리는 ‘높이 4척 이하 규수방부비’로 규정하고 벼슬 없는 이름난 선비는 ‘갈’을 세우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또 중국 명나라 때는 1품 이상은 이수, 2품은 기린수, 3품 이상은 천록벽사수, 7품이상은 윈수(圓首)를 쓰고 모든 묘비에 귀부를 쓰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산소에 제를 올리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은 태종무열왕릉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여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원성왕릉이나 안강의 흥덕왕릉 등에는 완전한 신라왕릉의 석조각 예술 형태가 완성되었다.
원래 넓은 묘역에 상석과 묘비는 별도로 떨어져 설치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토지도 좁고 편의상 상석돌과 묘비석을 함께 세워 놓는데, 아마 이번 광주에서의 해프닝도 옛 왕릉처럼 묘비를 산소에서 떨어져 별도로 세워놓았더라면 묘비 만지다 상석을 밟는 해프닝이 생기지는 않았으리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광주 5·18묘지의 사건을 계기로 다시 찾아본 태종무열왕릉비의 아름다운 조각예술에 찬사를 보내본다.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중국 당태종릉인 소릉주변 각 배장릉의 묘비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소릉박물관 내 이적의 묘비와 비교해도 태종무열왕릉비는 더욱 더 아름다움을 뽐낸다.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묘비의 모양만 보아도 그 묘가 만들어진 시대와 고인의 신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역사 문화 산책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