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후세에 전하기 위한 어떤 사실들을 나무·돌·쇠불이 등에 글을 새겨 세워놓는 것을 말한다. 비는 처음에는 묘 속에 세워졌고, 그 뒤 무덤가에 세워졌다. 비는 내용과 만든 의도에 따라 그 모습이 시대에 따라 달라져 시대적인 분위기를 보여 주므로 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 나라가 역사학·문자학·서예·풍속사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비문의 내용은 당시의 사회상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므로 역사서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제 경주신문이 유허비·사적비·신도비·송덕비·효자비·열녀비·기공비(紀功碑)·사비(祠碑) 등 우리고장에 산재한 비석을 찾아나선다. 비석 하나하나에 깃든 우리 조상의 삶의 궤적을 보듬어 보고, 그속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지혜와 교훈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노모위해 어린자식을 땅에 파묻으려 했던 손순의 지극한 효성기려 금장을 지나 현곡방면으로 방향을 잡고 계속 길을 따라가면, 현곡파출소, 농협, 우체국등이 들어서있고, 조금 더 지나면 조그만 다리(하구교)를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하구와 상구, 오른쪽으로는 무과리와 소현리로 갈라진다. 오른쪽 길따라 다리공사가 한창인 개울을 건너 조금만 더 들어서면 나타나는 마을이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효자마을 또는 순우정이라 불려지던 마을이다. 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수령이 몇백년씩은 된듯한 노거수들 사이에 비각도 없이 외롭게 서있는 비석이 있다. 신라 흥덕왕때 효자로 칭송이 높았던 손순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기 위한, 문효공 손순유허비다. 삼국사기 효선편에 실린 설화에 따르면, 손순은 신라 흥덕왕 10년(서기 835년)에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품을 팔아 얻은 양곡으로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해 왔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늘 말썽이었다. 철없는 어린 아들이 항상 老母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고심하던 손순은 아내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수 있지만 어머니는 얻을 수 없다”며 아이를 땅에 묻어버리자고 제안한다. 손순부부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에 가서 구덩이를 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땅속에서 큰 돌종(石鐘)이 나왔다. 부부는 이는 자식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묻지 않고 집으로 데려왔다. 부부는 종을 집의 대들보에 달아놓고 날마다 쳤다. 종소리가 퍼져 대궐까지 들렸다. 종소리를 들은 흥덕왕은 사자를 보내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는 “옛날 중국의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려다 하늘에서 내려준 금솥을 얻었다더니, 손순이 석종을 얻은 것은 그의 효도가 지극한 때문이다”하며 집한채를 주고, 해마다 벼 50석을 내려주어 그의 지극한 효성을 칭찬했다고 한다. 손순은 옛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돌종도 거기에 달아두었는데, 훗날 백제의 도둑이 종을 훔쳐갔다고 전하고 있다. 손순유허비는 1883년 9월 성재(性齋) 허전이 비문을 짓고,1883년 12월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현재 마을입구에 세워진 비는 1970년 손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유허비는 1996년 5월 경상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됐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