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다른 동물과 가장 다른 점 중 하나가 문자로 기록을 남긴다는 점이고 그것이 역사기록이다. 인간은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과거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 미래의 더 발전된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간다. 개인도 일기를 기록함으로써 과거를 잊지않고 더 나은 삶을 꾸며간다.
2010년이 저물어가는 이즈음엔 난 역사책을 펼쳐두고 우선 100년전 이맘 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살펴 보았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경술국치의 해였다. 그리고 1910년도엔 일본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우리나라 전 국토를 대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착수한 해였다. 신경주역사부근 역세권 개발을 둘러싼 분쟁, 구시가지 문화재보호구역 매입을 둘러싼 토지가보상, 고도보존법 시행을 둘러싼 경주시민의 가장 큰 반발원인도 오랫동안 묶인 낮은 지가를 기준으로 한 정부의 보상정책 때문이다. 이런 토지를 둘러싼 등기에 명기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이 생겨난지도 100년 전의 일이었다. 그전에는 모두 국유지나 마찬가지이고 경작권리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역사의 시계추를 더 돌려 500년 전인 15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1510년은 조선11대 중종 임금의 재위 5년차였다. 역사드라마 대장금이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500여년 전 우리나라는 갑자사화, 중종반정, 기묘사화 등 귀족들의 파벌싸움이 조선중기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때였다.
다시 역사의 시계추를 돌려 1000년 전으로 되돌아 가보았다.
1010년은 중국은 북송시대, 일본은 간코 7년이고 우리나라는 고려 현종 원년이었다. 고려 현종의 이름은 순(詢)이여서 임금의 이름은 피하여야 하기에 그 때까지 안동 일직면에 살고있던 순씨들은 본관을 순씨에서 ‘일직 손씨’로 바꾸어야 했다. 경주손씨, 밀양손씨, 평해손씨는 같은 후손이지만 일직손씨는 전혀 다른 순씨였는데 1000년전 현종 임금 때문에 손씨로 성을 바꾼지 꼭 1000년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1000년전 재위에 오른 고려 현종 임금의 아버지는 안종이고 할머니는 신라경순왕의 큰 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알고보면 안종, 현종에 이어 덕종, 정종, 문종 등 신라왕실 외손들이 고려왕가를 이어갔으니 신라와 고려는 역사적 맥과 전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가 있다.
500년을 더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1500전 전인 서기 510년은 마지막 마립간 지증왕 집권11년차였다. 지증왕은 503년에 신라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니, 올해로 1508년차가 되는 셈이다. ‘지증’도 신라최초의 시호였다. 509년에 서라벌에 ‘동시’를 두었다니 지금의 성동시장이 생겨난지도 1501년이 되는 셈이다. 512년에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울릉도)를 정벌했으니 독도가 우리땅이 된지도 1499년이 되었다.
2010년이 저물어가는 이즈음에 새삼스레 100년, 500년, 1000년, 1500년 전의 역사 기록을 들춰보았지만, 사실은 멀리 오래된 역사도 중요하지만 가까운 역사, 불과 1년전, 2년전, 3년전, 4년전 이맘때 우리경주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한번쯤 되돌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2005년 경주방폐장 유치 이후 불과 5년만에 너무나 큰 사건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아치고 있다. 한수원본사, 방폐물관리공단, 양성자가속기, 역세권개발, 본사부지변경논란, 유치지역지원사업비사용 등을 둘러싸고 지역의 지도자들과 공무원, 시민단체, 평시민들 간에 서로가 내뱉었던 말들, 약속들을 냉정하게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 한달전, 1년전, 2년전, 3년전 이맘때 쯤 경주역사에 어떤 발자욱을 남겼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송구영신의 새로운 의미가 아닌가 싶다.
천년의 자랑스런 역사도시인 경주이다. 천년의 역사 못지않게 지난 수년의 역사도 더 자랑스러워야 한다.
2010년을 마무리하면서 경주의 미래를 위해 가장 절실한 화두는 지도자와 시민들간에 신뢰회복이 아닌가 싶다.
신뢰는 시간과 공간 속에의 기억들을 비추어서 천천히 생겨난다. 자랑스런 역사문화도시에 살고 있는 경주시민들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 못지 않게 현재와 미래의 나라 역사를 만들어가는 더 큰 지혜를 발휘하기를 동해바다에 떠 오르는 새해 소망으로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