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만들었다는 옥적(玉笛)이 전해오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하고 이 옥적이 과연 신라 때의 것이 맞는가에 대해 여러 말이 있으나 경주 사람들은 진품으로 여기며 신봉해 왔는데 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신라가 망하자 나라의 진귀한 물건은 거의 고려에 넘어갔으나 옥적만은 계림에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 옥적을 보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여 불었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조령(鳥嶺)을 넘자 아무리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사신의 말을 들은 왕건은, ‘옛 주인을 아는 신령스러운 물건이구나’라고 탄식하며 계림으로 되돌려 보내 보관하게 하였다. 계림을 떠난 옥적은 어떠한 위무(威武)에도 굴하지 않고 옛 신라에 충정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옥적은 신라 충절의 화신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같은 말은 「고려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조선 전기에 경주지역 인사들 중심으로 전설화된 것이다. 또한 연산군 10년(1504) 7월에, 옥적이 왜 경주에 있느냐하며 내고(內庫)에 옮겨 보관하도록 명한 기록이 「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당시 옥적이 내고로 이관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경주 인사들의 완강한 청에 의해 옮겨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옥적은 경주 객사인 동경관(東京館)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전래 과정이 모호하다. 명종 2년(1552) 12월 2일 동경관에 대형 화재가 일어나 신라 때부터 전해오던 3백 25근이나 되는 대형 청동화로 등 유물이 소실하였다. 이 때 옥적도 같이 화를 당했다는 설과 관아 공방(工房)에 소장되어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 후 옥적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숙종 18년(1692)에 김승학이란 자가 우연히 동경관 토담 흙더미 속에서 옥적을 발견하여 갖고 있다가 그만 부러뜨리고 말았다. 숙종 33년(1707)에 부윤 이인징이 이를 알고 살펴보니, 길이는 한 자 아홉 치이고, 형태는 세 마디에 아홉 구멍(三節九孔)이 뚫렸다. 곧은 대나무를 본떠 만든 것으로, 그 빛깔이 희고 푸르렀다. 신라 때의 유물로 확신하고 ‘옥적전말기(玉笛顚末記)’를 지어 남겼다.
그리고 깨어진 부분을 밀랍으로 붙여 고정시켰다.
다시는 이 같은 화를 입지 않도록 옥갑(玉匣), 곧 옥적을 넣은 나무함을 만들었다.
괴목으로 만든 옥갑 가로는 59.3cm이고 높이는 11.2cm이다.
여닫이의 장석은 황금으로 만들었으므로 금장(金粧)이라 하였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금장 바탕에는 경주 팔경(八景)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이 금장팔경(金粧八景)이다. 고리는 신종(神鍾)을 본떠 조각하였다.
금장은 크게 삼등분으로 새겨져 있다.
상단 좌우에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대칭으로 수놓아 천지와 음양을 함축적으로 새겨 놓았다.
가운데는 포물선 모양으로 반월성을 그렸고 그 속에 시 한 수를 지어 넣었다.
그리고 하단에는 읍성 성벽의 중심에 첨성대가 자리 잡았다. 그 오른쪽 안압지에는 오리와 벌, 그리고 국화인 듯한 꽃 한 송이를 수놓았으나 왼쪽 그림은 식별할 수 없다.
금장팔경은 경주팔경으로 꼽을 수 있다.
곧 신종·반월성·읍성·첨성대·안압지·두성(斗星) 등을 들 수 있으나 나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신종에 새긴 문양을 보면 비천상(飛天像)과 유곽 및 좌우에 당좌를 뚜렷이 그려 두었다. 그림에 나타난 것은 모두 경주를 상징할 수 있는 대표적 신라 유물이 많다.
이는 모두 읍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옥적을 불었을 때 음향이 미칠 수 있는 거리이다. 천지 만물이 옥적의 청아한 소리에 화육(化育)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에 새긴 7언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반월성 머리에 안압지이고(半月城頭月映池)/ 첨성대 밖에 새벽종 소리 더디다(瞻星臺外曉鍾遲). 금문을 열려하자 금추가 먼저 움직이는데(金門欲啓金槌動)/ 바로 이때 선녀가 피리를 불며 나오는 듯하구나(正是仙娥弄玉時). 원문에 월영지는 안압지이고 선아는 선녀이다. 닫아두었던 옥갑의 금문을 열려하자 신종 모양을 새긴 금추가 먼저 울렸다. 이때 어디선가 선녀가 나타나 청량(淸亮)한 곡조로 피리를 불며 나타나는 듯하다는 전·결구의 시상이 참으로 일품이다.
이 같이 금장으로 장식한 옥갑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옥적은 진작 경주 인사들로부터 신라의 충혼을 간직한 신물(神物)로 간주하였고,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한 후 금장으로 장식한 함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였다. 옥적은 조선시대 경주인의 정신적 유물이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시를 지어 읊조렸다. 옥적이 신라의 유물이냐 진품이냐에 대한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경주 사람들의 이 같은 적극적인 수호의 의지가 없었다면 분명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옥적은 신라의 상징물이자 경주의 자긍심이었다.
1909년 4월에 통감 이토의 후임으로 온 소네 아라스케(曾根荒助)가 경주에 와서 3일 간 머무르며 관아 건물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옥적을 찾았다. 신탄(薪炭) 창고 구석에 먼지투성이가 된 옥갑을 발견하고 그는 쾌재를 불렀다. 이를 서울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에 소장해야 한다면 가져갔다가 경주박물관이 낙성되자 경주에 되돌려 주었다. 그 당시 어떠한 경위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옥적은 결국 경주인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언제가 다시 반월성과 첨성대 사이에서 옥적의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찬란했던 경주문화의 꽃이 다시 피울 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