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곤두박질한 영하의 날씨. 낙목한천으로 삭풍이 몰아치는데 경주慶州의 남산南山에는 겨울이 무색하리만큼 늘 언제나 신라인의 이름들이 춤을 추고 있다. 덩실덩실 신명으로 뛰고 있는 흥겨운 춤사위. 신라의 이야기는 타고 넘는 능선의 골짜기마다 신화로 묻혔다가 매일매일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난다. 이 추운 날씨의 바깥온도를 영상으로 높이는 중이다. 서서히 구들방처럼 데워지는 서남산西南山 냉골冷谷의 동짓달. 이대로 한참이 지나면 엉덩이를 디밀어 놓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울밋줄밋, 하늘로 솟구친 주상절리와도 같은 입석의 무리들. 그 사이 겨드랑이에는 칭칭 휘감아 녹수를 거느리고서 떠돌이 구름을 불러 모아 주섬주섬 받아넘겨 온 속절없는 이야기들. 그렇게 보낸 천수백년 한 세월이 찰나로 감추었다. 천길 아찔한 수직의 낭떠러지. 상사바위 저 너머에 한시름 돌팔매로 날려서 차안의 갈망을 씻기라도 하련만 하늘 끝이 너무 먼 탓에 돌아올 메아린들 있으랴 싶지 않다. 상선암上仙庵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넘치는 신라인의 기상과 마주 부딪쳐 서게 되는 여기. 가이 세상과는 분별되어지는 암자명 그대로의 상선암上仙庵 선경이 여기라던가? 무한계로 트여진 산속의 열린 공간, 매서운 바람의 저 건너편 서쪽으로는 KTX 신경주 역사와 이어지는지, 나들목 그림들이 한 걸음 더 가까이에 다가와 선다. 이 자리 거대한 부처바위가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어지럽게 흔들리는 인간세상을 말없이 내려다보며 앉았다. 불상의 조각솜씨에서 보면 신라의 전형적인 수법과는 달리 배분의 원칙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지만, 있는 상태에서 풍겨나는 장중한 느낌이란 남산의 그 어느 불상보다도 뛰어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여래불상의 높이는 약5.5m정도이고 무릎의 너비는 3.5m 그야말로 대불의 모습 앞에 서게 되는 내 작은 인간상의 초라함이란 말이 아닐 지경이다. 얼굴과 어깨 부분은 두터운 높이의 돌을 새김으로 조각한데 비하여 몸의 전체 부분은 자연바위 그대로에다 선각으로만 처리한 것이 이 불상만의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지그시 눈을 감고서 기대인 듯 뒤로 젖힌 상체의 자신감과 무겁게 눌러 앉은 앙련 위의 무릎자세 하며 전면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에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인의 표상을 대하는 듯 기개와 용맹이 불거지는 것을 보게 된다. 자세히 관찰하면 불두의 제작과 몸체가 조각된 시기에서 상당한 시간적 편차가 느껴지는데 불두는 8세기경의 작품성이 비치는데 반하여 선각으로 된 하부의 몸체는 그보다 훨씬 떨어진 후대의 9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판단할 때 이 부처 바위의 제작기간이란 무려 백년의 시간적 편차를 두고서 상당히 긴 세월 동안에 만들어진 과도기적 신라의 석조 미술품이려니 생각해 볼 따름이다. 전혀 맛이 다를 것 같기도 한 입체와 선각이라는 이질성의 규합으로서도 시공간을 초월한 걸작의 예술이 창작된다니, 여기 상선암의 마애여래좌상을 모델로 하여 극명하게 후세에까지 알려준 신라인들이 고맙고 또한 경외스럽다. 오늘같이 바깥날이 춥기는 해도 꼭히 춥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이처럼 오랜 열정에서 빚어낸 신라인의 예술혼들이 여태도 꺼지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했던 바에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남산에서 보게 되는 줄을 내 어찌 처음부터 알기나 했으랴! 태초에 산이 있었고 그 뒤의 남산에는 신라가 있었으며 신라의 뿌리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의 얼굴, 온전한 지체의 모습이 있었으려니 그렇게 생각된다. 과거와 현재는 허상과 실상의 관계일 수도 있는 것. 마애여래불상에서 나타난 입체와 선각의 조화에서 본 것처럼 허상과 실상은 또 하나 역사와 현실의 함수로도 있어진다고 보면 남산이야 말로 현실공부로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리라. 때문에 우리는 신라를 배우고 탐구하게 되는 것인 즉 그 어디, 그 무엇과도 비교할 데 없는 오랜 뿌리의 참된 교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이는 곧 자랑이기 전에 광영된 핏줄의 이력일 것이다. 불상이 내다보는 먼 하늘을 보라! 내일을 꿈꾸는 우리들 포부와 이상이 저 창공의 푸르름과 늘 함께 있지 아니한가?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몫으로 설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